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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n 24. 2024

평탄한 세계

프랑스 문학의 오늘 27화

[대문 사진] 뒤라스의 소설 『정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정인(L’Amant)』이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자 이에 대한 논의 또한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앙리 부이이에(Henry Bouillier)의 논평이었는데, <프랑스 신 잡지(La Nouvelle Revue françaises)>에 재능 넘치는 평문들을 발표했던 신랄한 앙리(Henry Amer ; 앙리 부이이에의 필명, Amer는 ‘신랄한’이란 뜻을 지녔다)보다 훨씬 더 신랄해진 앙이 부이이에는 『정인』이 그토록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많은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이 작품이 ‘작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으로 해서 프랑스인들의 밋밋한 취향에 적절히 들어맞았기 때문이라고 논박하고 나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투는 확실히 『태평양의 방벽(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에서 보듯, 물에 잠긴 인도차이나반도의 평원만큼이나 평탄하다. 이 물에 잠긴 벌판은 칠월의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클 때 추수가 이루어지는데, 소설 속의 화자인 그녀는 경작할 수 없는 모친이 사들인 땅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니는 것을 공허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의 방벽』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둑들이 무너지는 것은 곧 그녀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녀의 글투는 평탄하도 못해 얼마나 평이한가? 곧 불행이 몰아닥칠 것을 미리 예감하기라도 한 듯한 그녀의 글투는 다음의 예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빅토리아 왕조에 나오는 인생의 유위전변(有爲轉變)의 이미지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글투와 맥락을 같이하는데, 마치 불행을 피할 수 없다는 듯 파멸을 기다리는 표현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견고하게 짜인 두 개의 구문과 두 개의 물음들로 이루어져 있다. “실상 그곳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라고 뒤라스는 적고 있다.


“어찌 누구인들 몸을 바들바들 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처럼 물살에 밀려 산산 조각난 꿈들의 비탄과 분노 앞에서, 바닷물의 범람을 막고자 벌판에 둑을 쌓아 올린 순진한 농부들의 방벽, 그러나 천 년이 흐른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허탈감, 뜻하지 않은 기대 그리고 헛된 희망, 그 누가 하룻밤 만에 희망이 종이로 지은 집처럼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초연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단 하룻밤 만에 태평양의 성난 파도에 의해 단 한순간, 무자비하게 무너지는 희망 앞에서? 어찌 그 누가 그처럼 헛된 꿈의 생성을 연구하는 것조차 등한히 하면서까지 이 운명의 밤이 벌인 사건에 의해 항상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벌판의 불운에서부터 모친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설명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간단하지만 자연의 대 변동이 초래한 흥미를 끄는 설명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겠는가?”


앙리 부이이에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태평양의 방벽』은 그렇게 ‘밋밋한’ 소설은 아니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처음으로 펴낸 소설도 아니다. 그녀는 이 소설 이전에 벌써 두 권의 소설을 펴낸 바 있다. 1943년에 펴낸 『파렴치한 사람들(Les Impudents)』이 그 한 권이라 한다면, 1944년에 발표한 『조용한 삶(La Vie tranquille)』이 그 다른 한 권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1943년에 펴낸 『파렴치한 사람들』과 1944년에 발표한 『조용한 삶』.


뒤라스의 『태평양의 방벽』은 ‘감미로운’ 작품에 국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 소설이 노린 것 또한 결코 “작가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고장들에 대한 동경이 촉발한 인도차이나의 이국정취에 그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자]”한 것도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주조를 이루는 것은 차라리 동요하는 바다의 소용돌이와 같은 모든 것을 얽어맬 뿐만 아니라 15년간이나 공들여 자신이 사들인 양도물을 어떻게 해서든지 개척해 보려는 모친의 눈물겨운 노력들처럼 집요하고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비극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모친은 ‘걷잡을 수 없는 실패’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그녀의 죽음은 거의 발작에 가까운 일련의 심각한 위기 속의 냉엄한 그것이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온 것이다.


1950년의 소설 『태평양의 방벽』은 그처럼 그녀의 실제 상황을 다룬 작품의 효시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파 드 칼레 지방에서 태어나 자라 1912년부터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어 교사로 일해 온 도나디유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해(1918년)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캄보디아에 이양된 캄포 지역에 속한 땅을 사들이기 위해 그동안 모아둔 돈을 모두 투자한다.


이 땅은 정확히 말하면 시안만 가까이에 위치한 코친신의 북서쪽 시암과 경계를 이루고 있기도 한 국경 부근의 이양된 땅이었다. 그녀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둑을 쌓았는데, 끊임없이 밀려오는 조수는 그녀와 지역 주민들이 몇 년 동안 쌓아 올린 보람도 없이 허물어진 둑과 함께 그녀의 꿈마저 앗아가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도나디유 부인은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식민지 자치행정부로부터 땅의 소유권을 허가받는 것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뒤라스가 희곡을 구상하고 쓴 『에덴 시네마(Eden Cinéma)』(1971)에서는 1924년(이양된 땅을 사들인 해)에서 1931년(토지대장에 이의 신청 편지를 보낸)까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도나디유 부인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실상 그녀의 죽음은 이보다 한참 후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발생했다.


[사진]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덴 시네마』, 1971.


장 피에로(Jean Pierrot)는 1986년에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해 쓴 저술에서 그녀의 생애와 소설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나섰다. 장 피에로의 판단에 따르면, 실상 그녀의 소설은 마치 그녀의 자서전과도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지적하기를, 그녀의 소설 내용과 실제 이야기의 이 같은 현격한 차이는 예를 들어, 『나무 그늘 속의 흠 없는 날들(Des Journées entières dans les arbres)』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실제상으로는 그녀의 모친에 얽힌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파리에 사는 자식을 보기 위해 인도차이나에서 온 돈 많은 실업가로 변모한 노파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더욱 극명해진다고 주장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나무 그늘 속의 흠 없는 날들』


마찬가지로 『정인』의 ‘자서전적 진실성’에 관해서조차 의문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우며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열여섯 살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 무렵에 빈 롱과 사이공 사이를 도선(渡船)으로 오가던 돈 많은 중국인을 만난 것에 대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입장까지 표명하고 나섰다.


이러한 그의 평가를 종합해 볼 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전기는 단지 그녀의 문학 작품에서 윤곽을 드러낼 뿐,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는 다듬어지지 않은 한낱 재료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태평양의 방벽』에서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그렇고, 『정인』에서의 ‘감정 관능 교육’ 이야기 또한 ‘도제 소설(Bildungsroman)’의 유형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한다면, 장 피에로가 예측한 대로 플로베르의 탁월한 작품들에게서 그 준거를 빌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하나의 가설에 의지하여 단지 형태만 전기와 닮은 꼴을 취했을 뿐, 그저 단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그 진의가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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