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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n 25. 2024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진부함

프랑스 문학의 오늘 28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정인(L’Amant)』은 그 시작부터가 우리를 진부함 속에 몰아넣는다. 이 진부함은 온전히 작가가 의도한 창작 태도와 일치한다.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합니다. 내 열다섯 살 반이라고.

그는 메콩 강 위를 왕래하는 도선 승객이다.

단조로운 풍경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계속된다.

나는 열다섯 살 반, 이 나라에는 계절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린 오로지 유일하고도 무더우며 단조로운 계절만을 살아가고 있다. 봄조차 없는, 새로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단지 무더위만이 긴 띠를 드리우고 있는 지역에 우리는 있다.”


위의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인』이 초래한 문장의 빈곤함은 소설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존재(être)’ 동사와 ‘소유(avoir)’ 동사에서 비롯하고 있다. 결국 두 동사들은 단지 글쓰기의 용이함만을 제시해 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이다(C’est ~)”나, “~이 있다(il y a ~)”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존재’ 동사와 ‘소유’ 동사는 문체의 단조로움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다.


『정인』의 문체는 구어체에 입각해 있다. 또한 소설속에 같은 단어, 같은 문장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강조의 효과보다도 이 소설이 지닌 애절한 말투에 더 적절히 상응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의 앞장을 장식하고 있는 위의 예문은 책머리에 붙인 글(incipit)이 아니다. ‘또다시(encore)’란 부사는 그녀가 앞에서 들려준 이야기로 되돌아가기에 충분한데, 1984년에 이미 ‘쭈글쭈글해질 대로 찌든 얼굴’이 되고 만 그녀의 노쇠한 얼굴에 관해 되묻고 있는 두 물음을 다시 병치시킨다.


그러나 소설이 지닌 보다 근원적인 진부함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1944년에 털어놓은 속내 가운데에서 조용한 삶, 가식적인 조용한 삶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그녀의 삶을 이루는 것들이 점차적으로 끊임없이 게워지는 유출 현상에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초췌해지고 만 세월의 흐름 속에, 그리고 덧없이 흐르는 시간이란 강물의 흐름 속에, 더해서 오직 한 계절의 그칠 줄 모르는 더위 속에 바로 그녀의 삶의 진부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부함은 새로 움트는 기운들을 거부하지는 않으며, 또한 그녀는 소설에서 이러한 진부함을 새로 움트는 싹들의 비유를 통하여 난폭한 범람 현상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정인』의 앞부분에서 두 쪽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는 것 역시 “삶의 가장 젊고도 성대한 시기들을 관통함으로써 발생한 간혹 일시에 엄습하는 시간의 새로운 밀어올림”이라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기운은 태평양이라 부르는 대양의 거센 물살과는 다른, 그보다는 훨씬 잔잔한 움직임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은 하찮은 삶(inexistence)에 불과한 중성적 삶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러한 삶의 부재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표명한 바 있는데, 다음의 예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어느 쪽에도 강렬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 속에는 이미 그녀의 삶이 부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폴 클로델(Paul Claudel)은 이러한 부재를 글에 있어서의 빈곤함이 극에 달한 구성의 한 예라 규정한 바 있다.


“내 삶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길도 없고 선도 없다. 어떤 한 존재만이 있었노라고, 전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을 믿어야 하는 드넓은 영역들만이 펼쳐 있었노라 말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러한 평탄함 위에 세워진 또 다른 둑들은 끊어지고 허물어진 것일 수도 있다. 중국인과의 만남은 단지 메콩 강의 풍경 속에 그리고 벌거벗은 남자의 몸을 껴안은 그녀의 두 팔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만남은 그녀가 1984년에 발표한 글에서 ‘시선을 상실한 진부함’이라고 정의한 빈곤함 자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열여섯이 채 안 된 소녀는 물살의 잔잔함 속에 ‘급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도선을 고정시킨 밧줄이 끊어지는 날에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바다로 떠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급류 속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본다. 물살은 격렬하기만 하다. 세찬 물살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바위 덩어리들과 교회와 도시마저도. 강물 속에 요동치는 세찬 격류. 휘갈겨 드는 바람.” 강물 속의 범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러한 표현은 삶이 가식적으로 조용한 색조를 띠고 있는 것처럼 가식적으로 평탄한 양상을 띤 것일 수밖에 없다는 표현보다도 훨씬 의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겹도록 단조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뒤라스는 또한 모두를 너무도 때늦은 뒤에(par la lenteur) 얻을 수밖에 없는 땅에 대하여, “단지 숲만 바라보며 기다리다 지쳐 눈물 흘리면서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었던” 땅, 둑 덕분에 새로 생겨난 땅을 자신의 모친이 여전히 개발하고자 시도한다는 사실과 함께 갑자기 몰아닥친 강물의 범람으로 인해 배가 출렁이면서 배 위에 있던 리무진이 기울어지자 차 안에 있던 영국산 담배를 입에 문 점잖은 차림의 사내가 문을 열고 승용차에서 내리던 장면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차에서 내린 그는 메콩 강 위에서의 이 ‘기이한’ 만남에 반가움을 표시하고, 아이인 그녀는 바야흐로 ‘지금’ 그녀가 “메콩 강을 오가는 배 위에서 남자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질” 것이란 사실에 전율하기까지 한다. 결국 이 도선 위에서의 만남은 중국인 집과 리무진 ‘뒷좌석’을 오가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흥분상태에서의 관능적인 몸부림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그녀의 옷을 거칠게 벗기고는 그녀의 옷을 저만치 던져두었다. 그는 다시 부드럽고 하얀 속옷을 거칠게 벗겨 내리고는 알몸이 된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갔다.”


이어지는 다음의 짧게 끊어진 문장들의 연속 역시 진부한 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침착하게, 그를 그녀 곁으로 이끌어서는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두 눈은 이미 닫혀 있고, 그녀는 몸을 움직인다. 느린 움직임으로. 오로지 그녀를 돕기 위한 동작만이 요구될 뿐이다. 그녀는 그에게 움직이지 말 것을 요구한다. 내버려둬. 이제는 그녀가 할 차례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벌거벗긴다.”


그러나 정부의 성급함의 한 편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격렬한 침착함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녀는 바야흐로 조수의 밀어닥침과도 같이 그녀의 몸이 바닷물에 잠기게 되는 첫 경험을 할 찰나이다. – 여기에서 하나의 비유는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만개하고 있다.


“그는 끙끙거리면서 흐느꼈다. 그는 추악한 사랑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울면서 그는 그 짓을 계속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더한 고통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통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천천히, 거칠게, 기쁨에 넋을 잃어가면서 그녀는 자신의 몸이 옥죄어옴을 느꼈다.


바다는, 닫히지 않은 상태로, 아주 단순하리만치 비길 데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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