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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n 26. 2024

능란한 까다로움 1 : 롤 V. 슈타인의 겁탈

프랑스 문학의 오늘 29화

[대문 사진]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


바다는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Le Ravissement de Lol V. Stein)』(1964)에서도 등장한다. 어머니와 딸 사이인 두 여자가 찾은 티이(T). 백사장에서도 바다가 등장하고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롤 V. 슈타인의 겁탈』


모녀 사이인 두 여자가 난데없이 롤 브이(V). 슈타인이 연인 사이면서 이미 약혼식까지 마친 미카엘 리차르드슨과 함께 춤추고 있는 도박장 한가운데로 난입한다. “두 여자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백사장에 있었노라고 롤의 약혼자인 미카엘 리차르드슨이 말한다.”


더군다나 이 모녀는 롤에게 넋을 빼앗긴 나머지 그녀의 약혼자를 제거한 후에도 그녀마저도 제거할 목적으로 롤을 향하여 목표를 수정한다.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구조상 두 모녀가 끝내는 결혼을 약속한 두 청춘 남녀가 쌓아놓은 방벽을 허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바다는 소설 끝부분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롤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인 자크 홀드와 함께 티이(T) 백사장을 다시 찾았을 때, 바다가 수직으로 하강하는 불빛 속에 섬광을 발하는 것이다. 롤은 자크 홀드가 타티아나 칼의 기숙사 동료였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채, 그에게 접근하여 새 애인으로 삼은 터였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 조용하고 검푸른 바닷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서로 다른 빛깔로 반짝이며 뒤섞이는 물결이 이는 바다.”


이 짙푸른 바닷물살은 확실히 어디라 꼭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낯선 곳에 내리 퍼붓는 후끈한 열기를 통해 바라보는 바다보다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물살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훨씬 진절머리가 덜해 보인다. 이 미지의 바다는 아마도 그녀의 유년이 닿아있는 인도차이나를 연상시켜 주기에 충분한 캘리포니아가 틀림없다.


그러나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은 『부영사(Le Vice - Consul)』(1965)와 영화 「인도의 노래(India Song)」(1973)에서와 같이 인도를 소재로 했음은 물론, 그녀의 인도에 대한 심취가 잘 반영된 작품들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미지의 곳은 인도차이나를 연상케 하는 캘리포니아의 한 외딴 바닷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도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영화화 한 「인도의 노래」(1973)와 「부영사」(1965).


작품 속에 환기되는 태양의 열기는 롤 브이(V). 슈타인을 꼼짝 못 하게 가둬놓는데, 이는 그녀가 에스(S). 타할라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것과 묘하게 겹쳐진다. 에스(S). 타할라는 자크 홀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또 다른 사내이고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하다. 열기가 만들어낸 이 같은 동요는 그녀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부동적 상황으로부터 생성되고 있다.


“그녀가 멀거니 온몸을 내맡겼던 여름날의 열기는 한낮이 되자 더욱 번뜩거리면서 공허를 메워갔다. 롤은 열기에 속절없이 포박당하고 말았다. 동쪽의 모든 것들과 거리, 집, 이 알 수 없는 것, 대체 웬 더위란 말인가, 나른함뿐인 열기는.”


자크 홀드는 부동의 상태가 다시 활기를 띨 것이리란 확신도 없이 단지 부동의 상태를 탐구하면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제일 먼저 발생한 충격, 즉 미카엘 리차르드슨의 유괴로 나타난 모녀의 침범은 오로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온 무기력과 무관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옹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크 홀드와의 부딪힘은 그와 같은 무기력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롤 브이(V). 슈타인은 과연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녀는 그래서 그녀 내부에 새로 움트는 기운과 그 가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녀는 반대로 더욱 극도로 쇠약해진 침체 상태 속에 빠져들고 말 것인가?


뒤라스 소설의 기본적인 구조는 어느 면에서 약간은 쇼팽의 「두 번째 발라드(Seconde Ballade)」와 닮은 꼴을 취하고 있다. 열정적으로(con fioco)를 동반한 아주 느리게(lento)의 형태가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은 한층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다. 이 소설의 주요한 특징들에 의거해 볼 때, 작품을 지탱하는 구조는 소설의 전주 부분에서 무용에서 위로 가볍게 솟구치는 몸짓 동작을 연상케 하는 생기를 띠고(animato) 계속되다가 곧이어 느리게(adagio) 바뀌어 한참 동안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마침내 다양한 변주를 포함한 약간 경쾌하게(poco animato) 마침표를 찍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이 약간 경쾌하게 음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의도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소재로부터 출발하여 어느 평자가 이야기했듯이, 마치 “은막 속의 인기 연예인을 연상케 하는 성미 까다로운 고명하신 작가의 뜻밖의 작품”처럼 진열대의 상품들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작품들은 정상을 향해 치솟다가 다시 하강하는 구조를 띠고 있다.


그렇듯 그녀가 치솟아 오르던 정상은 1960년대에 씌어진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이나 『부영사(副領事)』와도 같이 작가가 좀처럼 만족할 것 같지 않은 작품임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느 작품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작품에 속하는 소설들을 가리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1950년에 펴낸 『태평양의 방벽』이나 1958년에 발표한 『모데라토 칸타빌레(Moderato cantabile)』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작품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롤 브이(V). 슈타인의 겁탈』, folio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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