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8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1-3


성지

알 킬할 도성

1232년 만성절 전날



롱슬랭은 주술사 드뱅(Devin : 드뱅은 자의적으로 ‘점쟁이’를 뜻한다) 주위로 모여든 동료 대원들을 살폈다. 소리 내지 않고 나무둥치 뒤쪽으로 다가갔다. 나무 꼭대기에 달이 걸리면서 나무들이 무성한 임간지에 희끄무레한 달빛을 뿌려댔다.


지독한 냄새가 땅에서 피어올랐다. 병사들 낯빛이 초상 치른 표정이었다.


드뱅은 군사들 가운데 자리 잡았다. 밑으로 처진 뾰쪽한 두건을 쓴 머리가 어둠 속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그걸 지켜보는 대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어느 날엔 가는 술 취한 약탈자들 가운데 한 명이 악마의 자식으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드뱅은 영국의 안개 낀 땅으로부터 왔노라고 지껄여댔다. 켈트 족 조상들이 비밀리에 물려준 유증물에 대한 확신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 것이 어찌어찌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게 드뱅이 되풀이하는 너스레였다.


롱슬랭은 속지 않았다. 드뱅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여기 모인 모두가 출신을 알 수 없는 용병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의 조리사는 프랑스의 선량한 국왕의 사생아이며, 활잡이 사수인 이탈리아 인은 로마 교황청에 소속된 추기경의 후손이고, 단검을 잘 휘두르는 샤랑트 인은 루지낭의 공주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둥, 약간은 주술사 같은 영국인은 그룹에서조차 눈에 잘 띄질 않았다. 롱슬랭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프로방스 인이라 불렀고 그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롱슬랭은 주의 깊게 드뱅을 살폈다. 드뱅은 지난달에 작은 촌락인 알데바라를 약탈할 때, 대열에 합류한 자였다. 어느 곳에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던 그가 홀연히 나타나 이슬람 인이 롱슬랭을 향해 반월도를 내리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단검으로 일격을 가하여 롱슬랭을 구해주었다.


프로방스 인으로 불리는 롱슬랭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를 대열에 합류시켰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닌가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끄는 무리에 속한 사내들이 드뱅이 루시퍼(이사야 서(14 : 12)에 등장하는 새벽의 여신의 아들 샛별)가 준 권한을 스스로 손에 거머쥐었을 뿐 아니라 눈은 이글이글 불길로 타올라 살기가 등등하다는 둥,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소리들이 들려온 탓이었다.


그가 이끄는 대원들의 약탈 행위에 대한 개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롱슬랭은 기막힌 재주를 타고난 드뱅에게서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질 않았다. 그렇듯 오랫동안 자신의 의식 속에서 하느님이나 사탄 모두가 사라져 버린 탓도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이 영국 남자가 대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부인할 처지가 못 되었다. 또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가 없었다.


동료 대원들이 둥그렇게 빙 둘러선 채, 깊이 파인 작은 구멍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구멍의 형태가 이상했다. 꼭짓점이 잘려나간 삼각형 형태였다. 드뱅은 집게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릇.”


드뱅의 목소리가 놀라우리만치 생생했다. 멀리서까지 또렷이 들릴 정도로 낭랑한 목소리였다. 머리에 뒤집어쓴 두건 밑으로 황금을 입힌 성배가 드러났다. 롱슬랭은 드뱅에게 어떻게 교회에서 그걸 훔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영국인 사내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칼날.”


단검이 튀어나왔다. 단검은 날카로운 조각이 들어간 세공품이었다. 달빛을 받아 칼날이 번쩍거렸다.


드뱅은 앞으로 다가서더니 수단의 닳고 닳은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목을 내밀었다. 성배 위로 흉터가 깊이 패어 있는 손목을 단검으로 깊이 그었다. 그러자 손목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시뻘건 묵주 알 같은 핏물이 방울져서 성배 안에 떨어졌다. 드디어 드뱅이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은 자들이 목마르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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