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21화
제1부 4-1
영국 옥스퍼드
지금 현재
꽉 찬 둥그런 보름달을 품은 건물 지붕들이 숲을 이룬 도시, 입술 사이를 흘러내리며 감탄을 절로 나오게 만드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 기숙사 건물 정면 부분을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달빛은 바벨탑 형상의 도서관 래드클리프 카메라의 천장으로 위풍당당하게 솟아오른 둥근 원형 지붕을 어루만지면서 잉크 빛 하늘에 산뜻하게 걸려있는 종들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하기까지 했다.
달빛으로 말미암아 밤의 천체는 돌의 꿈들에 실체를 부여하고, ‘꿈꾸는 종탑들의 도시’ 옥스퍼드를 빛낸 시인 매튜 아놀드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달빛은 또한 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이시스의 고요한 물살에 반짝이면서 하류 저 아래쪽에서 암스 하천과 뒤섞여 템즈 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이뤘다.
1096년 이집트의 성스러운 여신의 이름을 딴 강가에 건물이 들어섰을 적부터 아이들은 지식과 이성의 성채에 머물면서 강물을 흡입해 갔다. 북반구에 이런 독특하고도 눈부신 건물이 들어서기는 처음이었다.
도심 한복판에선 올드 마리라 불리는 커다란 벽시계가 10시임을 일러주고, 건물 안의 강의실들은 불이 꺼져있는 탓으로 더욱 고요하기만 했다.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영국에서 제일 오래된 대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맞춰 오가고 있었다.
가장 공부에 열심인 학생들은 각자 비좁은 방에 틀어박혀 복습에 여념이 없을 것이고, 그보다 덜한 학생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설치된 단과대학 공공장소에서 술 한 잔을 걸치거나, 벽에 붙어있는 작은 판에 화살을 던지면서 사랑의 장난에 자신의 운수를 시험해 보거나, 혹은 음침한 구석에서 우연의 장난에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옥스퍼드는 1백 년 전부터 모든 것이 체계화되어 있었다. 각자 모두 지식의 전당에 스스로에게 주어진 권리에 따른 장소를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만일 대학 입학 승인이 특권처럼 주어졌다면 – 12세기 때부터 각 지방의 지적인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조치로 간주된다. – 이는 도시 속의 도시들이라 할 수 있는 38개의 단과대학들 중 하나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정당하게도 각 칼리지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일과도 같았다. 옥스퍼드에 소속된 것은 아니지만,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나, 세인트 에드먼드 홀, 올 소울즈 칼리지, 리전트 파크 칼리지 또는 엑서터 칼리지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각각의 칼리지나 홀들은 각자의 교회와 문장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린 템플턴 칼리지의 문장은 정 중앙에 메르쿠리우스의 지팡이를 축으로 양옆으로 초록색 바탕을 하고 있으며, 울프슨 칼리지의 문장은 황금색과 붉은색이 양분되어 전체적으로 밝은 베이지색을 띠었다.
칼리지는 각자 고유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학생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고 식사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 마찬가지로 스포츠 활동을 지원해 주는 식이었다. 학생들 각자는 개별적으로 교수들의 지도를 받으며 학장들, 부총장들, 주요 인사들 또한 다른 동료 교사들과 같은 지식의 군대에 소속된 모든 지휘관들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 미로와도 같은 도시에 대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진로를 추구해나가야만 했다. 물론 그들에게 부과된 권리와 의무 또한 준수해야 했다. 이는 각각의 칼리지에 소속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도시 한 중심에는 리전트 파크 칼리지의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한 건물들에 가려져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물 하나가 숨어있었는데, 그게 바로 건물의 외장 돌벽이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검게 그을린 저 유명한 신학대학 건물이었다. 건물은 1745년에 지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 때였다. 건물은 옥스퍼드 대학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수수한 건축물에 속했다.
대학의 총장은 옥스퍼드가 자랑하는 최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대학 출신 가운데 한 명을 선출했다. 총장실은 대학 본부의 양 날개에 해당하는 서쪽 방향에 자리한 건물에 들어선 행정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 안에 들어앉았다.
반대편으로 그랜드 홀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건물에 덮개로 내려앉아 건물 외벽을 더욱 얼룩덜룩하게 만들어놓았고, 호사스러운 현관 입구 또한 이미 위풍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는 곰팡내 나는 회랑이라 해야 마땅할 부속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안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저작물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8백만 권에 달하는 ‘보드’ 총서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래드클리프 보드 총서 도서관이나 176킬로미터에 달하는 서가의 길이 또는 후크 장서들은 그야말로 장관에 가까웠다.
아니 여기엔 그보다는 덜 진귀한 대학 출판물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장서들은 어딘가에 따로 잘 보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거의 아무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없었지만, 장서들 안에 담겨있는 내용은 이곳을 찾는 발걸음을 결코 헛수고로 만들지 않을 만큼 의미심장한 것들이었다.
독서 열람실의 내부 장식은 그 자체로는 별로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입구를 받쳐주고 있는 기둥들 위에 설치한 현무암으로 조각된 아누비스의 2개의 작은 조각상마저 없었다면, 더욱 평이해 보일 수도 있는 실내장식이었다. 두 마리의 여우들이 음침한 공기를 더욱 음산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결코 환영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함마저 맴돌았다.
건물 깊숙이 안쪽에는 작은 사무실 하나가 들어섰는데, 음산하고도 누르스름한 유리창이 외부 세계와 사무실을 완전히 단절시키고 있었다. 사서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근무하는 예순은 되어 보이는 사내는 상냥함이란 손톱만큼도 없어서 가끔씩 호기심으로 길 잃고 헤매는 이들을 내쫓아버리곤 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주일에 3시간만 근무했다. 그의 근무시간은 도서관 열람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더군다나 문 여는 날은 천차만별이어서 도서관이란 허울 좋은 명색만 띠고 있을 뿐, 전혀 타당치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는 이곳에서 사려 깊은 눈으로 바라보면 한쪽에 무연탄 색깔로 그을린 나무 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문은 오로지 하나뿐인데 사서가 근무하는 집무실 바로 뒤편에 나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상한 장소에 와있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커다란 방은 검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직사각형이고 비밀스럽게 은폐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암흑과도 같은 검은빛 천장은 돌출된 부분을 완전히 사라져 보이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남과 북 양쪽 벽에 붙어있는 두 줄로 된 안락의자는 부드러운 벨벳 천으로 덮여있고 소파에 앉으면 정면 쪽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정 중앙 바닥은 오직 희끄무레한 대리석으로만 깔려있다.
안쪽 깊숙이 사무실이 또 하나 자리 잡고 있는데, 역시 칙칙한 색조로 덮여있다. 실내 한쪽 구석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무대 안쪽에 높이 올라선 연단 또한 자리하고 있다. 벽 위쪽으로는 진홍색 붉은빛으로 칠해진 해골 하나가 걸려있다.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 12명의 남자들과 여자들 얼굴은 인상이 뚜렷하여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빛을 발했다.
각기 6명씩 양쪽에 앉아있다. 남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고 여자들은 우중충한 색상의 옷을 입은 채다. 손들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데, 그들 모두는 사무실 뒤쪽에 위치한 사내를 향하여 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전등 빛으로 말미암아 13명 모두가 지옥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유령들처럼 창백한 낯빛이다.
만일 우리의 주인공 정탐꾼이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적당한 간격을 띄운 채 일렬로 앉아있는 이 인물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 인물들 모두 대체 무엇을 논의하는지를 궁금해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