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템플 기사단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24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4-4


영국 옥스퍼드

지금 현재


회원들은 순서대로 일어서서 상자 앞에 멈춰 섰다. 회원들 모두가 내기를 거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의장은 그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는 차례가 되어 투표를 하였을 뿐이다. 그때 수석 감독관의 단호한 시선을 직감했다. 수석 감독관은 의장이 단 한차례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은밀하면서도 열광적인 표현으로 일관했다.



시간이 도래했다.



회원들 각자는 수석 감독관이 표현한 구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의장이 주저하고 있는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만일 투표 결과가 수석 감독관 쪽으로 기울어지면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의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의장의 처지가 너무도 간단하게도 한 줌의 공들의 색깔로 결정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의장은 고개를 들었다. 마치 암흑의 바다에 빠져들고 있는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템플에서 처음으로 겪는 아주 거북하고도 불편한 상태가 계속된 탓이었다. 그는 어둡고도 차가운 이시스 강물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시스 강물은 아주 가까운 곳을 흐르면서 자신의 운명을 모면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장은 될 수 있으면, 그가 머무르고 있는 체스터의 자택이나 웰스톤 클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했다. 시가를 한 대 피워 물고는 네덜란드 퀴라소 술을 찔끔찔끔 마시면서 군주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사회적 신분이 있으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일에 휩쓸리는 일은 없을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것은 정지되고 완전히 처음으로 되돌려지면서 집회소에 입장하는 것조차 거부당할 게 분명했다.


30년 전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그 시절은 지붕 잇는 사람으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젊고 눈부신 미래를 예정하고 있던 나이였다. 그들은 그를 점찍어 두었다. 뉴턴의 법칙에 정통한 칼리지 스승 가운데 한 명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그들은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의 지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고 결점들마저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들은 그를 검은 템플 기사단에 입회시켰다. 같은 시기에 같은 칼리지 소속의 또 다른 신입자가 템플 기사단에 입회하였는데, 그가 바로 수석 감독관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을 검은 공들과 빨간 공들의 똑같은 시스템으로 끌어들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그들은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들의 공통점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들을 계시하였다. 그는 여전히 전임 의장의 무거운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선택되었소.
그게 바로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제안이란 것이오.



의장과 수석 감독관은 서로 다른 방법을 추구했다. 전자가 내각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면, 후자는 보이지 않는 영향력,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동업 조합의 도움으로 재정 업무를 관장하는 분야로 진출했다. 그 두 사람에게 있어서 집회소에서의 목표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최고의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의장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형제들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했다. 의장은 나무망치로 탕탕 치면서 일격을 가했다.


“자정이 되었소.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집회소 창건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것입니다. 나는 운명의 집을 여는 일에 수석 감독관의 입회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수석 감독관은 의장을 쳐다보고는 의장 뒤쪽으로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의장은 상자로 손을 뻗어 첫 번째 공을 꺼내 들고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불빛 아래로 갖다 놓았다.


검은색.


두 번째 공 역시


검은색.


의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징조였다. 형제들은 아마도 그들의 임무가 상당히 무거울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의장은 세 번째 공을 꺼내 들었다.


빨간색.


네 번째.


검은색.


기대가 되살아났다. 의장은 마치 아내가 결혼 3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한 1976년 산 소테른느 포도주 병마개를 뽑는 듯한 느낌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투렌느 지방의 루아르 강을 따라 한가로이 여행할 수 있는 일주일간의 휴가가 주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의장은 서둘러 동작을 좀 더 빨리했다. 다음번에 나온 공의 색깔은 그의 기대를 완화시켜 주었다.


빨간색.


그는 신경질적으로 다음 공을 꺼내 들었다.


빨간색.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형제들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장은 다음 공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 그다음엔 검은색, 빨간색, 빨간색, 검은색 공이 이어졌다. 공들의 색깔은 카지노의 룰렛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의장은 자신에게 불리한 지 여부를 따져보기 위하여 동작을 잠시 멈췄다. 공들은 실내 한가운데 자리한 벨벳 천으로 씌운 정사각형의 탁자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었다. 검은색 공들은 오른쪽에 빨간색 공들은 왼쪽에 자리했다.


검은 공 6개.


빨간 공 5개.


마지막 표결을 하기까지에는 찬반 의사를 상징하는 2개의 공들이 남아있었다. 검은색 공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면 끝이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을 종결하고 문학부에 집회소의 정관들을 적용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다시 투표가 개시되기까지는 1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여기저기서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다. 의장은 수석 감독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이 굳어져있었다. 마치 자신의 추락을 사전에 예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의장은 다시 공이 담겨있는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높이까지 공을 높이 쳐들었다. 잘 닦인 공의 표면이 반짝였다.


빨간색.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동수.


이제 공 1개만 남았다. 회중석에 앉아있는 형제들은 돌부처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숨소리나 중얼거리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수석 감독관은 살그머니 책상 가까이로 다가갔다. 은발의 머리카락을 한 사내의 두 손이 움직이면서 벨벳으로 덮인 책상 위에 공들을 배열하는 것이 마치 최면술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장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지막 공을 움켜쥐었다. 마음속으로 그는 오로지 만트라(티베트어에서 파생한 영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고 중얼거리는 낱말 또는 구절)만을 되뇌었다.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자신이 하는 짓이 어린애들이나 하는 행동처럼 유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하여 마치 카지노에서 룰렛을 즐기는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에 운수를 거는 색조에 대한 물신 숭배마저 떠올리게 만들었다.


의장은 자신이 쥔 공의 표면이 딱딱하다고 느끼자 공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어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공을 쥔 손을 불빛을 향하여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펼쳐졌다. 손바닥에서 흐른 땀이 공에 묻어있었다. 의장은 무언가가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희멀건 한 얼굴들이 이제는 악마들처럼 여겨졌다. 집회소는 그의 주변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빨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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