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81화
[대문 사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
나무 조각은 상아 조각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는 로마네스크의 예술가들의 활동을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요인이기도 하죠. 그러나 나무라는 소재는 썩기 쉬운 재료여서 상당수가 소실되어 현존하는 작품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제작한 십자고상입니다. 제단 가까이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십자고상에 관한 주제는 나무로 제작한 조각 장식에서 가장 많이 되풀이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상반신 조각상>은 발 다란(Val d’Aran) 지방에 위치한 비엘라(Vielha)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에 감긴 눈, 턱수염, 잘 빗질한 머리 등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름답게 잘 표현되었죠. 이 조각상은 미트그 아란(Mitg Arán) 옛 수도원 교회가 소장했던 작품입니다.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써, 호세 다리마티의 솜씨를 유감없이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 특유의 솜씨에 의한 예수 왼쪽 옆구리가 깊이 패어있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제작한 십자고상이 가장 많이 되풀이된 주제이긴 하지만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현실로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주저했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십자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죠. 로마네스크 시기는 이러한 주저함과 망설임이 내내 교차하던 시기였습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십자고상은 사형에 처해진 인간이 고통에 신음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입니다. 구세주는 항상 살아있는 형상이어야만 했습니다. 눈을 크게 뜬 채 고통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어야만 했으며, 어떠한 고통스러운 모습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콜루비움(colubium)이라는 허리에 띠를 두른 기다랗고 헐렁한 옷(투니크)차림에 가려진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머리카락과 턱수염 역시 잘 다듬은 모습이어야만 했습니다. 십자고상은 따라서 죽음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부활에의 영광을 약속한 하느님의 아들, 즉 성자를 상징했습니다.
로마네스크 조각가들은 한결 같이 십자가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루까 대성당의 십자고상인 ‘성스러운 얼굴(Volto Santo)’은 매우 잘 알려진 십자고상으로 이를 숭배하는 순례자들이 이를 직접 보기 위하여 전 유럽에서 몰려들 정도였죠.
십자고상은 예수 그리스도 도상(iconographie)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니케데모스(Nikêdêomos)[2]가 예수의 무덤에서 본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루까의 성스러운 얼굴은 레바논 삼나무로 제작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예수의 몸에 수의를 입혔다는 점입니다. 이 십자고상이 바다를 건너 루니를 거쳐 마침내 루까에 도착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성스러운 얼굴(볼토 상토)’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카탈루냐 지방의 교회들에서 복제되어 그리스도 형상의 전형으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 붙여진 이름이 위풍당당한 구세주란 뜻의 마제스타(Majestat)입니다.
십자고상은 독일에서도 복제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1173년에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된 십자고상들 가운데 하나가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십자고상은 사실 중세 시대에 전 유럽에서 제작된 것과 거의 동일한 수준입니다. 이를 본떠 제작한 십자고상이 툴루즈의 생 세흐냉 성당의 북쪽 익부(트란셉트) 측랑에 자리한 후진에도 걸려있습니다.
이따금씩 정결한 신앙심을 지닌 일반 대중들은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상에서 더 큰 감동을 받고 이를 측은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동정심의 발로가 죽임을 당해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군 그러나 얼굴만큼은 평화롭고도 빛이 서린 듯한 구세주의 도상을 등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상 가운데 가장 애처로운 감동을 주는 십자고상 하나가 쾰른의 성 게오르그 성당에 보존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저 고딕의 시대에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담은 리얼리티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몇몇 특정 지역에서는 조각가들이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예수와 일곱 명의 인물들(숨을 거둔 예수와 마리아, 요한, 요셉 다리마티, 니코데모스, 그리고 두 명의 십자가형에 처해진 도둑들)을 다룬 「십자가 강하도(降下圖)」를 나무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최후의 순간이 드라마틱한 장면들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스페인에서 제작된 것만 해도 40여 점에 달합니다. 여기저기 박물관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에서 상당수가 카탈루냐 지방의 피레네 인근 발 데 보이(Vall de Boí)에서 수집한 것들이죠.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슴을 에는 듯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십자가 강하도」가 산 후안 델레스 아바데쎄스(Sant Joan de les Abadesses)의 수도원 교회 후진에 걸려있습니다. 아마도 13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나무로 제작된 것 중의 하나가 성모상입니다. 마리아 조각상은 십자고상 이상으로 상당수가 제작되었죠.
카탈루냐는 그 많은 약탈과 전란이 빚은 파괴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어 이채롭기만 합니다.
세르다냐 단 한 곳에 소장된 것만 해도 그 수가 24점 가까이나 됩니다. 조각상들은 모두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어머니(Mare de Déu)’란 애정이 듬뿍 어린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조각상들은 유럽 전역에서 확인되는 것들과 거의 유사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서로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런 유형의 조각상들은 유럽 도처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제작된 성모상은 농촌 여자의 얼굴처럼 약간은 거친 인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애정을 갖고 대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지장을 초래할 만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 반대의 인상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상은 대부분 마리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모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무릎위에 걸터앉아 있죠. 실상 마리아는 오직 아기 예수 때문에 존재할 따름입니다. 이 아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성서가 예언했듯이 그리스도로 강생 한 세상을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마리아는 스스로 슬기로운 인물로 인격화되기 전에 이미 ‘지혜의 옥좌’에 앉은 인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점차적으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성인과 시토회 수사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마리아 형상은 그 자체로 중요성을 띠게 되죠.
도상학적으로 볼 때, 아기 예수의 위치는 마리아 품에서 무릎으로 이동합니다. 마찬가지로 팔에 안긴 자세로 바뀌고 있죠. 이제 더 이상 어린 어른(유아적 성인)에게 드리워진 근엄한 인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단지 엄마와 장난치는 어린애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죠. 엄마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몸을 곧추 세운 성모 마리아의 옷차림은 황후의 옷차림으로 변합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지혜의 옥좌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성모 마리아(노트르담)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도상 또한 점차적인 변화를 보입니다. 마리아께 봉헌된 미사나 제식에 따라 동반 상승하여 변화하고 있죠. 이러한 점진적인 추이는 로마네스크 시대에서 고딕 시대로의 영성의 변화를 예고해줍니다.
[1] 미루나무로 제작한 것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색칠로 인해 원래 다색으로 장식칠을 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두상 조각은 라보디유(Lavaudieu)의 성안드레아 성당에서 사용하던 십자가에 붙어있던 것입니다.
[2] 니케데모스(Nikêdêomos)는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끌어내려진 예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