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33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7-2



성지

알 킬할 도성

1232년 만성절 전날


“…어라? 아랍 말소리가 들리네.”


주술사 드뱅은 양손에 팽팽히 당겨진 화살을 문 너머로 날려 보냈다.


수비대장 쿠비르는 난생 처음 항복하고 말았다. 최선의 방책은 학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끝까지 싸우던 병사들도 차례차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복면을 두른 채, 칼을 휘두르며 악마들은 항복한 병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그들도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약탈자의 우두머리가 신원을 확인한답시고 쿠비르를 심문하던 것을 마치자 협상 조건을 제시했다. 마침내 쿠비르는 속사포같이 명령을 쏟아내던 이가 금발의 사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도끼가 들려있었다.


“기욤! 저자들에게 불이 난 집에 가서 불 끄라고 해. 빨리! 불이 더 번지기 전에.”


그러자 기욤이 죄수들을 이끌고 불이 난 집으로 곧바로 달려가서 우물물을 길어 진화하기 시작했다. 안심이 되었는지 쿠비르는 프랑크 사내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몸을 돌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사냥 나팔을 꺼내 들고는 롱슬랭 앞에 갖다 놓았다.


“이것을 받게나. 내 선조들이 사용하던 것이지만, 그대의 명령에 따르며 복종하겠다는 증표로 주고 싶네.”


통역사가 쿠비르의 말을 롱슬랭에게 들려주었다. 프로방스 사내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나팔을 집어 들고는 세공 솜씨에 감탄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하고 빠른 음조로 쿠비르에게 롱슬랭은 프랑크인들은 이쯤에서 전투를 중지할 것이며, 약탈을 금지하고, 제식을 치르는 성소를 보호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더해 포로에 대한 몸값으로 새벽이 오기 전까지 2천 마르크 은화를 징발하여 그에게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도시와 주민들은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번복되지 않을 말에 장사치들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프랑크인들에 붙잡힌 순간 모두는 약탈과 살인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또한 정해진 기간 내에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고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롱슬랭은 볼모들을 각기 유력한 부족 집안에 배당하도록 지시했다. 만일 그 부족들이 몸값을 지불하지 않을 시에는 즉각 처형할 것도 함께 명령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침묵이 흐르는 순간에 롱슬랭은 그와 같은 협상 조건들을 제시했다. 쿠비르는 롱슬랭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늙은 장사치 부훼다 역시 쿠비르와 보조를 같이 하며 롱슬랭에게 다가갔다. 롱슬랭 앞에서 두 사람은 허리를 굽힌 다음 천천히 허리를 펴고 주민들을 향해 돌아섰다. 장사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알라신께 감사드립시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로 하여금 죽을 위기를 모면케 해 주셨고, 가증스러운 약탈과 노예가 되는 수치를 면하게 해 주셨소이다.”


군중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훼다는 쉰 목소리를 토해냈다.


“프랑크인들은 이 도시의 지배자들이오. 그들은 우리를 살게 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소. 그들은 우리의 딸들을 겁탈하고 우리의 재물을 약탈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오.”


부훼다의 면전에서 사내들이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여자들은 차도르로 얼굴을 감쌌다.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장사치는 말을 이어갔다.


“프랑크인들의 대장은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소이다. 황금보다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소이다. 프랑크인들은 우리에게 거래를 제안했소이다. 여기서 그것을 논의하지는 말고 각자 집에서 다시 모이기로 합시다. 나 역시 볼모들과 합류할 것이오.”


롱슬랭은 통역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각 집안들이 모임을 갖는다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기욤을 불렀다.


“이슬람 사원에 포로들을 다 가둬놓아라. 이슬람 사원은 세 개면 충분하다. 사원 입구는 철저히 봉쇄하고 경비도 세우고.”


기욤이 서두르자 롱슬랭은 기욤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포로들은 ……. 너 좋을 대로 해…….”


기욤의 눈이 반짝였다. “……여자들도 알아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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