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사내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35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7-4



성지

알 킬할 도성

1232년 만성절 전날


벽에 찰싹 달라붙어있던 크하타니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는 등불이 뿌연 빛을 흩뿌렸다. 누군가 막 숨이 넘어가는 헐떡임이 들려왔다.


“누구냐?” 막 활대에 화살을 장전하고 들이닥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에게 크하타니가 물었다.


“이름을 까먹은 지가 오래되었네.”


“귀신이냐?”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닐세. 신도 나를 저버렸지.”


이맘의 이마가 세모꼴로 주름이 잡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유일하게 악마들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맘은 다시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


드뱅은 대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듯,


“영혼과 몸.”


바닥에 널브러진 마이모네스는 더 이상 몸을 가누질 못했다. 드뱅의 거친 손이 그를 붙잡아서 사정없이 들어 올렸다.


“너 유대인?”


랍비는 단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두 눈은 이미 풀려있었고 손은 바들바들 떨면서 오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나 고약한 질문을 던지는 사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내게 영혼이 있어.” 드뱅은 결론짓듯 말했다.


영국인 사내는 손등으로 랍비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마이모네스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이맘을 돌아보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크하타니는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눈물이 뺨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울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나는 신의 남자다. 온정을 바라니 제발 날 살려다오.”


“신과 온정이란 말은 내게는 귀에 거슬리는 두 단어일 뿐이다. 이 마호메트 교도야. 너 알아? 죽은 자들이 내게 말하는 것을?”


“아니…….”


“그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목이 말라 네 피를 마시겠노라고. 지옥에 떨어진 천벌을 받은 자들은 네 정맥을 타고 흐르는 생명의 즙을 좋아해.”


영국인 사내는 사냥용 큰 칼을 꺼내 들고 크하타니의 복부를 갈랐다. 내장 꾸러미가 타일 바닥에 쏟아졌다.


“악마들이 와서 내장들을 먹어 치울 거야.”


죽음의 고통으로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입술이 뒤틀어진 크하타니는 그가 파놓은 죽음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너 잘 봐. 인간은 그저 단순한 몸뚱어리일 뿐이야.” 드뱅은 어깨에 마이모네스를 짊어지고는 대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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