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트리트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39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8-4



영국 런던

템플 거리

지금 현재


닉 드라이는 활기찬 걸음걸이로 엠뱅크망 길을 따라 내려갔다. 길은 블랙 플라이어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하도급 연구직으로 입사한 뒤로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행복감이 온 전신을 타고 흘러 퍼지면서 점점 그를 흥분시켜 갔다.


500,000만 파운드라! 그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처음 훼인스워드 경의 밀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하마터면 전화를 끊을 뻔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사악한 장난질 전화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훼인스워드의 밀정을 처음 만나 그로부터 신중하면서도 은밀한 제안을 받은 후, 이를 수락하자마자 즉시로 5천 파운드를 건네받은 뒤부터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더군다나 밀정이 제시한 액수를 보자마자 양심의 가책이나 어떤 거리낌 같은 것마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제 초라하고 볼품없는 인생은 이로써 완전히 종막을 고한 셈이었다. 눈곱 낀 얼굴이긴 하나, 이제부터는 햇살 찬란한 눈부신 삶만을 꿈꾸면 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아니면 스페인에서,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 마냥 축축이 젖어들게 만드는 이 나라를 떠나, 모든 것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이 나라만을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그가 떠나기 전 모든 일들을 다 때려치울 때까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마저도 자신을 의기소침케 만드는 까다롭고도 괴팍한 얼뜨기 상관의 괴롭힘만 견뎌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란 그렇듯 고작 떠날 때까지 잘 참고 견뎌내는 일뿐이었다.


닉 드라이는 입을 벌리고 한 입 가득 공기를 들이마셨다.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그는 처음으로 새로운 감정과 함께 무언가에 도취되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그것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절대자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걸음을 재촉했다. 짜릿하게 흥분되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닉 드라이는 아무도 기다리는 이 없는 캠던 타운의 비좁은 단칸방으로 바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맘먹었다. 대신 곧바로 옥소로 달려가서 강 건너편에 위치한 체인 레스토랑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밀레니엄 돔 근처에 자리한 건물에 들어서 있는 레스토랑에는 인터넷으로 예약한 늘씬하면서도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에스코트 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스미나, 두 시간에 400 파운드.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칼리엔토의 새 여자와 꽤나 빼닮았다.


칼리엔토는 드라이가 태어난 고향인 리버풀 소속 센터 포드로 활약 중인데 흥분을 잘하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바람 잘 날 없는 리버풀 경기장에 휘날리는 깃발들에는 좌우명 같은 구호가 적혀있었다.



그대 홀로 뛰지 않는다.



그렇다. 지금 그는 홀로 걷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돈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것도 충분하리만치!


닉 드라이는 커브 길을 돌 때마다 멋진 야스미나 사진들이 들어있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달콤한 이야기를 나누는 꿈에 젖어갔다.


광란의 밤이 되리라. 화끈하게 2시간을 보낼 각오마저 단단히 서있다. 더군다나 달콤한 순간을 위해 모처럼 면도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귀족을 만나기 직전에 턱수염을 밀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몇 대의 차량만이 템즈 강변로를 달리고 있었다. 강변 대로는 거의 인기척이 없는 광야를 방불케 했다. 그는 30미터 전방에 둥근 원 안에 줄 처진 표지판을 보았다. 지하철 노선을 표시한 로고였다.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택시를 타는 것이 훨씬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돈이 있었다. 오! 이런 인생역전이 있다니. 초라하고도 불행했던 자신의 삶이 점점 엷어져 감을 느꼈다.


닉 드라이가 마르벨라 강변에 있는 팝 광고판 앞을 지날 즈음, 등 뒤에서 마른 체격을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여보세요!”


드라이는 뜻밖에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랐다. 사내가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립스틱 모양의 작은 금속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제가 보기론 이거 당신이 흘린 것 같은데.”


드라이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방첩국 소속 비밀 요원 같은 복장을 한 남자는 그에게 다가와 마치 자신을 후려칠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뇨. 그런 것 흘린 적 없는데요. 실례합니다. 제가 바빠서요.”


순간 달착지근한 그러면서도 약간은 구역질 나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런 유형의 남자라면 자기가 쓰는 향수보다 훨씬 품질 좋은 향수를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다가온 남자는 통을 잡은 손아귀를 꽉 다시 쥐면서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정말 당신 주머니에서 떨어진 걸로 착각했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익명의 남자는 종종걸음 치면서 왔던 길과는 정 반대쪽으로 멀어져 갔다. 드라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속으로 생각했다. 립스틱이나 들고 어슬렁거리다니 뭐 하는 작자야, 도대체! 드라이는 그를 뒤쫓아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하는 폼은 꽤 점잖은 편인 것 같던데?



천벌을 받아 지옥에나 떨어져라.



닉 드라이는 지하철 입구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창녀와 그 짓을 하는 데는 딱 2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도로 그 2시간을 활용할 참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파도치며 그의 온몸을 달구어갔다. 실실 웃음마저 흘러나왔다.


순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이상 증세가 느껴졌다.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에 치밀어 오르면서 호흡마저 가빠졌다.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통증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면서 마치 붉은빛의 집게처럼 날카로운 핀셋이 폐를 찌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드라이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어떠한 말도 입 밖에 내뱉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온몸마저 오그라들었다. 단추를 벗기려고 셔츠를 움켜잡았으나 그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숨을 내쉴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보행자들이 오가는 길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닉 드라이는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됐다. 바싹 마른 머캐덤 식 포장도로에 목덜미가 부딪혔다. 의식이 흐려지면서 모든 게 가물가물해져만 갔다. 순간 누군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 목소리 같은 가냘픈 목소리가 저 멀리서 마치 반향음처럼 메아리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구원을 요청할게요.”


드라이는 여자의 얼굴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이 더러운 귀족 놈의 새끼, 그 새끼야. 드라이는 그녀를 쥐어뜯고 있었다.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여자의 코트를 잡아당겼다.


“난……. 로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호흡을 멈추지 말아요. 당신은 지금 심장이 가쁜 상태예요."


미스 엘드릿지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정신없이 두드려댔다. 닉 드라이가 쓰러져있는 곳에 다행히 그녀가 나타난 것이긴 했지만, 그녀로서는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암담했던 탓에 그를 구하는 일이 헛수고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조금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이 같은 심각한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엠뱅크망으로 오려했던 것일까? 게다가 구급상황실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국민 건강을 위해 정부가 하는 짓은 이제 놀랍지가 않았다. 마치 고기를 마구잡이로 두드려 써는 듯한 정부 대책은 이미 비비시(BBC) 방송의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신물 나듯 봐왔던 터였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그저 물살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통화를 시도하면서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청하려고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특히 영화에서 보듯, 심장이 멎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처치한다거나 또는 마사지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선(SUN)> 잡지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구조대원들이 설명하기로 반대쪽으로 부상자의 몸을 돌려놓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뭐라 더듬거렸다. 그녀는 그가 로드라 부르는 어떤 귀족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겨우 알아들었다. 그런 그를 그녀는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불쌍한 사람 같으니라고. 결국 그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를 공격한 이는 사실 방금 전에 만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멋진 남자처럼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좀 전에 보았던 신사를 떠올린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달콤하면서도 추잡스러운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놀라면서 얼굴마저 붉어졌다.


착한 것만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눈앞에는 한 가련한 인간이 심장마비로 죽어가고 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부가 금지하고 있는 약물을 떠올려 보았다. 저주받을 응급실들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 가엾은 알비용(영국의 옛 이름)이여!


닉 드라이는 15초 동안 더 심장을 헐떡거리다가 이내 호흡을 멈췄다. 그는 미스 엘브릿지 두 팔에 안긴 채, 숨을 거뒀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예쁜 야스미나에게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까지도 꿈꾸게 만들어주었다.


이 참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10여 미터 거리 저쪽에서 검은색 벤틀리 차량이 조용히 시동을 걸고는 블랙 플라이어스 다리 쪽을 향해 서서히 멀어져 갔다.




매거진의 이전글템플 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