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58화
[대문 사진] 영국 레이크 디스트릿 국립공원
제1부 15-1
영국
웨스트 컴브리아
지금 현재
밤은 서쪽을 향해 암흑의 외투를 펼쳐가다가 마침내 영국령의 마지막 남은 영토까지 냉혹하게 어둠으로 물들였다. 마지막 섬광을 토해낸 해마저 이미 사라진 아일랜드를 향한 저 너머로는 쓸쓸한 잔광만이 희미하게 깔렸다.
영국의 구석진 곳이나 다를 바 없는 바다는 독특하게도 검은 물살에 납을 부은 것 같은 금속성의 창백한 빛깔마저 띠었다.
적의에 찬 차갑게 얼어붙은 땅
어두운 창공을 파란빛으로 번쩍거리며 날고 있는 <매 2000> 제트 여객기는 맨체스터 상공을 한 번 선회하더니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가 칼라일 공항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관제탑은 비행기가 온전하게 내려앉을 수 있도록 즉석에서 착륙 허가를 내주었다.
이 시즌에는 상업용 제트기 운항이 그리 많지 않아 고도를 낮춘다 해도 다른 비행기들과의 충돌 위험성은 전혀 없었다. 비행기 조종사는 지긋지긋하다는 눈빛으로 바다 쪽을 바라다보았다. 조종사는 이곳처럼 습하고 구석진 곳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북아일랜드를 합친 이른바 영연방이라 부르는 지역 자체를 혐오했다.
델가도 기장은 오직 단 하나의 목표만을 떠올렸다. 가능한 한 빨리 비행기를 착륙시켜 자신의 비위를 상하게 한 승객들을 부리고 난 다음 다시 이륙하여 더블린을 향해 한시바삐 날아가는 것이었다.
더블린에서는 이틀 뒤, 런던으로 출발하는 같은 소속의 항공사 직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수 좋으면 템플 바 거리에 있는 선술집에서 예쁜 여자를 만나 함께 밤을 지새울 수도 있었다. 그는 조종석을 바로 고쳐 앉고는 승객들에게 안내방송을 알리는 실내 경고등을 켰다.
손님 여러분! 엔젤 플라이는 5분 후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델가도 기장은 착륙 조명등이 켜져 있는 좁고 기다란 활주로 쪽으로 비행기를 몰았다. 비행 운항시간은 1시간 30분이 채 못 되었지만, 회사에는 추가 연장 근무 시간을 적용해 달라고 이야기할 참이었다.
그는 파리 부르제 공항의 타르마카덤 공법으로 포장한 활주로 상에서 단지 두 명의 손님을 태우기 위하여 하루 종일 대기 상태에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비행기에 도착해서 한 짓이란 그에게 쓸데없는 말을 걸어온 것이 전부였다.
더해 그들은 왜 승무원 없이 조종사 한 명뿐이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와 여자는 비행기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해서 날아가는 동안 안전벨트를 다시 풀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가 늘 대하던 바쁜 업무에 쫓기던 사업가들, 파티에 참석한 스타들, 은퇴한 부자들과 같은 유형의 손님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더욱이 그를 놀라게 한 사람은 여자였다. 그렇게 나쁜 인상은 아니었지만, 생김생김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구석이 있어 보였다. 싸늘한 눈빛. 냉혹한. 밀수 암거래나 하고 다니는 부류에 속한 인상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가용 제트 비행기를 세내어 타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
지난해 스페인의 마르베야에서는 한 커플이 코카인이 잔뜩 들어있는 우단으로 둘러싼 커다란 펠리컨 장난감 인형들을 비행기에 싣고 막 이륙하려던 찰나 세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 때문에 그는 다시 풀려나기 전까지 도시 근교에 위치한 더럽고도 악취가 진동하는 유치장에서 사나흘을 보내야만 했다.
파리 부르제 공항에서 엔젤 플라이 여객 담당 대리인은 그를 안심시켰다. 항공사 고정 고객인 유럽 각지에 자문단을 파견하고 있는 에든버러 컨설팅 회사가 비행기를 빌렸다는 것이다. 두 명의 승객은 별다른 문제없이 세관을 통과했다. 그들의 짐 가방들 역시 아무 문제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화물 운송 직원들 손을 거쳐 비행기로 재빠르게 옮겨졌다.
비행기가 출발하자 비행기의 안전을 위한 방도로 델가도 기장은 승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걸 들을 수 있는 보안용 마이크를 켰다. 그러나 두 승객은 비행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기만 했다.
델가도 기장은 칼라일의 조그만 도시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는 불빛들을 발견하고는 기체를 하강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왼쪽으로 선회했다. 그는 생애 통틀어 딱 하룻밤을 웨스트 컴브리아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이 무미건조한 영국 땅은 맨체스터 북쪽 스코틀랜드 바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가 이 도시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싸움판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범죄자들과 알코올 중독자들의 소굴을 연상케 하는 이 싸구려 술집이 더 이상 영업을 할 수가 없게 되고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에 그는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조그만 공항의 활주로에 켜진 불들이 비행기가 내려앉을 자리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비행기의 동체가 기울자 두 명의 남녀 승객은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30대의 머리를 빡빡 민, 턱은 뾰족한 젊은 남자가 두 다리를 펴고는 여자에게 보일락 말락 의문의 표시를 던졌다.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가나?”
“헬리콥터 한 대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어. 다시 이동하는데 10분이면 될 것 같아.”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을 받았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지 기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비행기 유리창을 통하여 그들은 어둡고도 거대한 광석과도 같은 건물 몸체를 확인하고 있었다. 공항 청사로 사용 중인 건물은 단 한 채의 건물뿐이었다.
비행기 바퀴가 느닷없이 활주로에 닿자 두 사람은 가죽으로 된 좌석에서 벌떡 솟구쳐 일어났다. 프라트 앤드 위트니 사가 제작한 제트 엔진이 추진력을 역류시키면서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포흐 오 프랭스[1]에서 일하는 조종사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카리브 해로 암거래하는 밀매 조직인 리어제트와 연관된 일을 하고 있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우리를 실어 나르는 기장도 같은 항공학교 출신 조종사인가 봐.”
제트기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유일하게 불 켜진 트랙으로 들어섰다. 개인 자가용 제트 비행기 전용 활주로였다. 비행기는 오렌지색 안전모를 쓰고 보호대 아래쪽 턱 끈을 바짝 졸라맨 안전 요원의 지시에 따라 청사까지 이동했다. 델가도는 출입문을 열 수 있도록 가스를 빼고 착륙 계단 안전장치를 풀었다. 바깥 기온은 7도를 가리켰다.
빌어먹을 놈의 나라
기장은 항공사 로고가 반짝이는 감색 모자를 눌러쓰고 조종사 제복을 집어 들었다. 제복 바깥으로 젖혀있는 깃 부분에는 하얀 두 날개를 펼친 천사 상이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다. 가끔씩 그의 취향에 불을 지르는 마크였다.
그는 조종석 문을 열었다. 이제 쉬는 일만 남았다. 조종석 문을 열고 나가 승객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우두커니 섰다. 승객인 두 명의 남녀는 안전벨트를 푼 채, 벗어놓은 웃옷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갈 신호만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검은 천으로 된 커다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두 명의 남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종사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상태를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가시길 원하시면 조금만 비껴 주세요. 비행기 문을 열려면 다른 비행기들과 마찬가지로 사람 손으로만 열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델가도가 출구의 붉은색 커다란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는 동안 비행기 동체 오른편에 바짝 붙어있었다. 습기를 동반한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는 접혀있는 작은 계단이 바닥을 향하여 완전히 풀릴 때까지 작동 버튼을 누르면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한 쌍의 남녀는 인사를 나누는 법도 없이 그의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의 입에서는 거의 기계적인 음성과도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엔젤 플라이는 손님 여러분께서 좋은 여행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희 항공편을 다시 이용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두 남녀는 기장의 말에 전혀 대꾸하는 기색이 없었다. 승객들은 제트기에서 점점 멀어져 검은색 헬리콥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헬리콥터에는 아무런 표시도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델가도는 그들의 등 뒤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싸가지없는 연놈들! 엿이나 처먹어라!”
유조차량이 비행기 끄트머리 뒤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델가도는 타르마카덤 포장도로로 내려와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주유하는 동안에는 절대 담배를 피울 수 없지만, 그는 금연 규정을 무시했다. 그와 같이 밖에서 담배를 태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흘깃 뒤쪽을 바라보니 유조차 기사는 힘들여 기체 옆구리 쪽으로 급유 호스를 연결하는 중이었다.
델가도는 헬리콥터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헬리콥터 제작사인 벨 모델들 가운데 하나가 틀림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천천히 빙글빙글 선회하기 시작했다. 오렌지 빛깔 조명을 받아 조종석에 앉아있는 그들의 얼굴을 멀리서도 선명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거대한 곤충이 천천히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그에게 손가락으로 뭐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확실치가 않았다. 프로펠러가 윙윙대는 소리가 점점 커져가더니 헬기가 천천히 어두운 허공 속으로 날아올랐다.
델가도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 담배꽁초를 내던지고는 세관 건물을 향하여 급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는 한 시간 이내로 이곳을 떠나 더블린에서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젖어갔다.
[1]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 항구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