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87화
[대문 사진] 시제나 산타 마리아 수도원 문
로마네스코 벽화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아름답게 꽃을 피웠습니다. 특이한 일은 도심이나 수도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서 벽화가 제작되었다는 데 있죠. 고립된 지역일수록 프레스코 벽화 제작이 훨씬 수월하리 만큼 그 최적지는 아니었나 하는 추측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카탈루냐 지방의 한적한 산골 벽지에 수많은 벽화들이 몰려있습니다.
카탈루냐 지방에서 제작된 벽화들이야말로 이 지역의 특색을 고루 갖춘 감성이 빚은 열매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고립된 지역에 방치되고 있다는 이유로, 또한 이를 보존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여기저기 산재한 벽화들을 바르셀로나 박물관으로 한데 모아 영구 소장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옮겨진 벽화들은 비크(Vic), 솔소나(Solsona), 우르젤(Urgell) 지역을 아우릅니다.
벽화들은 예술의 주요한 원천에 입각해 볼 때, 그 흐름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첫번째 흐름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자생한 예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죠. 이를 대표하는 것이 모사라베(Mozarabe) 회화입니다.
모사라베 회화에 기반한 벽화들은 다양한 색조를 바탕으로 장면 하나하나마다 생동감 어린 묘사로 넘쳐날 뿐만 아니라 마치 채색 삽화에서 보듯 줄무늬 형태로 서로 이어진 장면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인물의 윤곽선과 각 장면의 테두리를 명확하고도 정밀하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검은 선을 사용하여 어떨 때는 굵게 또 어느 경우에는 가늘게 표현했다는 점도 특별하죠. 색조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기만 합니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처리하지 않은 완벽한 조형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기반으로 한 프레스코 화들이 타울, 바르베라 델 발레스, 벨캐레 담포르다, 생 마흐탱 드 훼놀라, 레 클뤼즈 등지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롬바르디아 예술을 통하여 영향을 받은 비잔틴 예술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모사라베 예술이 기여한 바를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프레스코 화가 산 페레 델라 세우 두르젤의 후진 장식입니다.
또한 안도라 계곡에 위치한 교회들에게서도 비잔틴 예술의 경향이 읽힙니다. 대표적인 교회들인 산 미구엘 앙골라스테흐(Sant Miguel d’Engolasters), 산테스테베 안도라 라 베야(Sant Esteve d’Andorra la Vella), 산 로마 델레스 봉(Sant Romà de les Bons), 산 페레 데 부르갈(Sant Pere de Burgal), 그리고 산 끼르체 데 페드레(Sant Quirze de Pedret) 교회들에는 아직까지도 프레스코 벽화의 흔적들이 남아있어 그 아름다움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싹튼 이 지역을 대표하는 회화예술의 유파가 생 리지에와 발스에 이르는 피레네 전지역으로 퍼져나갔을 정도입니다.
카탈로냐에서 유난히 많은 페널 화가 제작된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페널화는 제단화 자체를 목적으로 하였거나 혹은 제단 양 측면을 장식하려는 이유로 제작되었죠. 이 가운데 많은 숫자가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데,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란 아트 내셔널 뮤지엄>과 비크(Vic)에 소재한 <교구 박물관>이 대표적인 곳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제단화의 주제들은 교회 후진을 장식하고 있는 성화들의 주제들과 동일합니다. 예를 들면 4 복음사가들을 상징하는 형상이 둘러싸고 있는 정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옥좌에 앉아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든지 열 두 사도를 거느린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아기 예수를 담은 장면들,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압축한 내용들입니다.
에스파냐는 제단화 말고도 또 다른 형태의 벽화가 풍성하게 제작된 곳입니다. 사라고사가 주도(州都)인 아라곤 지방에 위치한 바구에스(Bagüés)는 푸아티에 지방의 프랑스 예술가들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은 곳이죠.
시제나(Sigena)수도원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프레스코 천장화가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불행하게도 시민혁명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벽화는 영국의 윈체스터 복음서에 등장하는 세밀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카스티야 지방에 위치한 레온의 산 이시도로 국왕의 영묘를 장식하고 있는 벽화는 1180년경에 제작한 것입니다.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 화는 그 중요성이나 가치 면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작품인데 다행히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로마의 시스티나 소성당’ 프레스코 벽화를 연상케 하는 영묘를 장식하고 있는 천장화는 밝은 바탕에 강렬한 색조로 인물을 강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조형미 또한 아주 뛰어나죠. 인물의 동작은 유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인물을 좀 더 명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윤곽선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원 풍경을 도입한 점은 신선한 느낌마저 줍니다. 프랑스 서부지역의 예술적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로부터 얼마 후에 세고비아의 산 후스토(San Justo) 성당을 장식한 프레스코 화가 완성되었습니다. 교회 후진에 들어선 프레스코 화는 전지전능한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4명의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네 형상이 예수 둘레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한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24명의 원로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프랑스 회화의 주제와 대동소이하지만, 이미 고딕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롭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