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61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16-1



알 킬할

1232년 만성절 축일


교황 특사는 어깨에 둘러멘 두건 달린 소매 없는 망토를 벗어던진 뒤, 도성 입구로 다가갔다. 재들로 뒤범벅된 연기가 끊임없이 성벽 위로 피어올랐다. 태양의 뜨거운 열기마저 화재로 아수라장이 된 혼란을 가중시켰다.


먼지만이 가득한 땅바닥에 모든 것이 나뒹굴었다. 특사는 약탈자들을 잠잠하게 누그러뜨리고 돌아온 호위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갑옷을 입은 기마병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보병들에 걸려 넘어질 정도로 시체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 많은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정탐질을 하던 이들 또한 널브러진 상태였다.


교황 특사는 딴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죽은 자들을 쳐다보았다. 죽은 자들 대부분은 처참한 몰골을 한 채였다. 술에 찌든 얼굴에다가 이가 다 빠져나간 모습으로 죽음이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증거 해 주는 듯했다. 몹쓸 악마들 같으니라고. 그들은 오로지 남의 것을 약탈하면서 생을 이어왔을 따름이라고 특사는 생각했다. 하느님이 마침내 성스러운 땅을 말끔히 정화한 것이라 그는 결론지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창들에 포위되어 옴짝달싹 못하던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사내가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끌려간 뒤에야 비로소 지상은 다시 평정을 되찾아갔다.


교황 특사는 가던 걸음을 멈췄다. 많지 않은 숫자의 기병대로 약탈자들을 모두 제압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도미니크 수사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알아챘다.


“주교님! 이 가증스러운 것들이 저를 죽이려 했사옵니다.”


성벽을 가리키고 있는 수사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교황 특사는 대답을 미뤘다. 다만 포승줄에 묶여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떨고 있는 여인네들과 이슬람 인들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포승줄 끄트머리에는 희끗희끗한 수염을 단 등허리가 휜 노인네가 무릎을 꿇린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저들을 풀어줘라.”


“주교님!” 도미니크 수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 약탈자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주옵소서. 저 하느님께 향한 믿음을 저버린 자들에게, 저…….”


교황 특사는 도미니크 수사에게 잠자코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특사는 맨 앞에 있는 포로에게로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구는 입술이 일그러진 상태였다.


“이름이 뭐냐?”


“기욤.”


“네가 우두머리냐?”


놀란 듯 커다란 덩치를 한 몰로수스[1]는 롱슬랭을 쳐다보았다. 여우는 거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네.”


거구는 걱정이 되었는지 진땀을 흘렸다. 거구는 자신과 함께 포로로 붙잡혔다 풀려난 죄수들이 오합지졸을 이룬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 중 몇 명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들의 시체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개중에는 간혹 옷이 벗겨진 상태여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알몸을 한 시체도 있었다.


“저 자를 포박하라.” 교황의 대리인이 목소리 높여 명령을 내렸다.


체념한 듯 롱슬랭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승줄이 기욤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았다. 입구 쪽에서 포로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한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울부짖었다. 어떤 이들은 손으로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면서 통곡하기도 했다. 다른 이들 역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점점 히스테릭 한 광기가 그들을 사로잡아갔다.


교황의 특사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욤을 포박하고 있는 병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자들에게 먹이로 이놈을 산 채로 던져라.”






주술사 드뱅은 고개를 쳐들고 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과 같은 보폭으로 계속 걸어가면 해가 지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미쳤다. 들판은 황량하기만 했다. 어쩌다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은 오직 구루병 걸린 작은 관목들이 들어찬 언덕 사이를 이리저리 맴돌았다. 어쩌다가 산양 한 마리가 갑자기 바위들 사이로 뛰어나왔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드뱅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덕 기슭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들이 통행을 방해할 정도로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고독이 뼈를 으스러지게 만들 순간은 아직 아니었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마지막 순간에 암초를 만나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옥죄이던 걸쇠가 풀리면서 기억들이 술술 풀려나갔다.


교황 특사가 군사들과 들이닥치면서 살육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드뱅은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랍비를 붙잡은 뒤, 그와는 떼내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새로이 난입한 자들로 말미암아 그들과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드뱅은 랍비를 포기하고 다른 약탈물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사라지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우연히 시체에서 주운 옷으로 변장하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멀리서 보면 소름 끼치는 유령과도 같았고 가까이서 봐도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피가 얼룩진 터번 아래 앙상하게 초췌해진 얼굴은 사형집행을 당한 이의 몰골과도 흡사했다.


아직까지는 그를 잡으려는 십자군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도성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피해 성안으로 진입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제일 좋은 방법은 열성적인 순례자들 틈에 끼어 누군지 모르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함께 도성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1]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커다란 몸집을 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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