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망 드 페리고르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68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1부 18-2



예루살렘

템플 수도회 건물

1232년 만성절 축일 저녁


아르망 드 페리고르는 창문을 닫고 벽난로 가까이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난로 안의 장작더미에 불씨가 막 불꽃을 일으키던 참이었다. 올해의 만성절 축일은 너무도 춥고 음산한 날씨이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눈알을 굴려가며 고문서학자가 물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네. 기사단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이 비렁뱅이를 붙잡아 신원을 조사하였을 따름이라네.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구걸하고 다니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있어 큰일이네.”


고문서학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바깥세상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 밖의 세계였다. 처음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한 뒤로 고문서학자가 수도원 밖으로 나선 것은 딱 한차례뿐이었다. 지중해를 횡단하여 성지에 도착하는 기나긴 항해를 위해서였다.


성지에 도착한 뒤로도 소름 끼치는 두려운 기억이 그의 의식 속에 계속 남아있었다. 고문서학자는 수도원 밖에 나가는 일 없이 오로지 템플 고문서관에서 수사본들을 연구하는 일을 고집스레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 고문서관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극도로 삼갔다.


“진짜 큰일일세.” 단화에 매달린 박차의 울툭불툭 튀어나온 부분을 쇠줄로 둥글게 갈면서 페리고르가 말을 이어갔다. “템플 기사단장의 신분인 이상 내게는 기독교도들 이외에도 성지 순례자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다네. 비참한 상태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형제들을 도와줘야 할 의무도 있고…….”


고문서학자의 장난기 섞인 두 눈동자가 정지된 시간을 공허하게 가리켰다. 신학적 의문들은 그를 더욱 끝없이 수사본들을 뒤적이게 만드는 열정으로 몰아가면서 그의 뇌는 오직 수사본들을 주해한 주석들로 가득 차 있는 무덤과도 같이 되어버렸다. 고문서학자는 어떠한 경우든지 머릿속에서 자신이 단 주석들이 언제든지 되살려낼 수 있도록 수사본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고민하고 연구를 계속해갔다.


“빈곤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아르망 드 페리고르는 더 이상 고문서학자의 말을 들으려는 기색이 없었다. 거듭되는 전쟁에서의 군사적 패배로 말미암아 템플 수도회의 명성이 빛이 바래질 대로 바래진 것을 되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템플 기사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의 동포들이 빈곤에 처해 허덕이는 비참함을 덜어주지 못한 것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규칙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동양에서 긁어모은 금붙이들은 모두 서방으로 착착 옮겨지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금융가들이 조직적으로 템플 수도회를 위해 일하는 중이었다. 땅을 매입하는 것은 물론 상업 활동에 투자하고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면서 점점 부를 축적해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르망 드 페리고르는 고개를 쳐들고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황금이 모든 것을 썩고 부패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다행인 것은 템플의 성스러운 사명이, 오직 그것만이 악으로부터 템플을 지켜줄 따름이었다.


익명의 사내는 문장 문신이 새겨진 손바닥을 다시 오므렸다.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기마병조차 아무 말 없이 자신이 타고 온 말고삐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사내는 헛간과 광이 들어찬 궁정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많은 숫자의 형제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다.


수사 형제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아무런 장식도 없는 수수하고도 검소하기만 한 각기의 건물들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건물들은 솔로몬 신전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모든 이에게 활짝 개방된 예루살렘은 그러나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도성이기도 했다.


폭동이 일어나거나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불순분자들이 약탈을 일삼게 되었을 때, 템플 요새는 폭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만일 적들이 공격을 감행하거나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경우에도 형제 수사들이 몇 달간은 포위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포도주 창고나 곡식 창고들이 모두 이곳에 집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요새의 지하 곳곳에 자리한 넓고 깊은 공간이 서로 긴밀하게 이어진 연유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층계 맨 꼭대기까지 올라간 정체불명의 사내는 고개를 쳐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끝없이 늘어선 둥근기둥들이 숲을 이룬 채, 기둥들 몸체를 빙 둘러 가며 횃불들이 밝혀져 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마법의 숲에 들어서는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진은 정확한 크기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각기 사용처 또한 분명했다. 맨 왼쪽 공간은 식량 저장 창고로 활용되고 있었다. 저장 창고에는 기름을 담은 묵직한 항아리들 하며, 소금을 담아놓은 통들, 훈제한 생선을 걸어 놓은 진열대, 소금에 절인 고기를 담아놓은 배가 불룩한 항아리들이 놓여있었다.


오른쪽 입구에는 무기 창고가 들어섰다. 삼목을 베어 만든 기다란 널빤지 형태의 탁자들 위에는 옆으로 쇠 장갑들을 비롯하여 박차들, 갑옷들, 쇠사슬이 달린 갑옷들이 나란히 놓여있고, 검은 나무로 만든 받침대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칼들을 필두로 끝이 날카로운 단검들, 창들 그리고 철퇴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내진의 한가운데 공간엔 하얀색 돌들과 검은색 돌들로 된 바둑판무늬의 저수조가 지하 깊이에 자리했다. 정 중앙엔 문짝 전체에 대못으로 징을 박아 넣은 문이 가로막고 있어서 아무구나 입구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정체 모를 사내는 바둑판무늬로 설치한 저수조를 돌아 건물 입구의 자물쇠를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그러자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너무 깊어 계단 밑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층계참에서 템플 기사가 손에 칼을 쥔 채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수염이 더부룩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그에게 형제의 인사를 나누었다.


“어서 오시게나. 드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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