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74화
제2부 20-1
예루살렘
1232년 11월
하늘에 어스름한 황혼이 물들어가기 시작하자 젊은 여인네의 몸이 반쯤 헐벗은 풀밭에 눕혀졌다. 칼로 베인 그녀의 옆구리 통증은 더 심해져만 갔다. 파랗다 못해 시커멓게 변한 입술 사이로는 피마저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몸을 일으키는 것은 고사하고 눈물을 흘릴 기력조차 상실한 듯 보였다. 오직 바싹 메마른 땅바닥에 쓰러져 먼지처럼 변한 흙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4분의 3 가운데 한 명이었다. 부상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성욕을 만족시켜 줄 여인을 독차지할 순서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왔던 짐승 같은 사내였다.
사내들이 연달아 몸으로 찔러대는 바람에 여인네의 복부에서는 끊어질 듯한 아픔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여인네는 답답한 하늘에 대고 애처롭게 애걸할 뿐이었다.
얼마간 떨어진 곳에 롱슬랭은 올리브나무 아래 자리 잡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구역질 나는 병사들의 집단 강간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섯 번째 용병이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사내를 밀치고 나이 어린 여자의 두 넓적다리 사이로 자세를 취했다.
두 번째 사내와 세 번째 사내 중간에서 양치기 젊은 여자애를 단도로 찌른 자가 바로 다섯 번째 사내였다. 사내는 그녀가 해가 지면 숨을 거둘 것이란 사실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꿈틀거렸는데.” 투덜거리며 여자의 살 속에 몸을 집어넣으려고 꾸물댔다.
가냘픈 몸뚱어리가 괴상망측한 경련으로 말미암아 뒤틀려갔다. 롱슬랭은 여자의 고개가 자신을 향해 돌려졌음을 알아챘다. 무서움에 가득 찬 빨갛게 충혈된 두 눈에 기울어진 햇살의 잔광이 그녀의 두 동공을 황금색으로 물들여갔다.
여자는 롱슬랭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 이외에는 다른 무리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롱슬랭은 직감했다.
여자는 입술이 창백해진 채 울부짖었다. 롱슬랭은 몇 트와즈 [1]에 걸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지만 여자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날 죽여라!”
황금빛 눈물이 여자의 눈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는 사내들이 하자는 대로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온몸이 마비되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날 죽여! 더 이상 이 짓을 하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날 죽여라.”
롱슬랭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나 사라진 감정이 되살아났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녀의 울부짖음이 고함소리로 바뀌어 그를 향해 세차게 퍼부어지고 있었다.
“날 죽여라, 롱슬랭……. 날 죽여, 롱슬랭……. 날 죽이란 말이다. 롱슬랭!”
롱슬랭의 번쩍이는 홍채 둘레로 겁에 질린 여자의 낯빛이 어른거렸다. 프로방스 사내는 그러나 늘 그렇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만은 없을뿐더러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추호도 없었다.
이 같은 짓거리야말로 용병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알 킬할을 접수하기 전에는 삼가해야 할 짓이기도 했다. 여자의 몸을 짓누른 사내가 있는 힘을 다해 아랫도리로 그녀의 사타구니를 찔러댔다. 갑자기 터져 나온 여자의 울부짖음이 이번에는 오른쪽 귀에 꽂혔다.
“날 죽여라.”
여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오로지 외마디를 질러댈 뿐이었다. 핏기 없는 뺨이 풀밭에 짓눌린 채, 저녁 해마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기울어지면서 그녀의 두 눈에서 타오르던 섬광마저 사라졌다. 롱슬랭은 도끼의 손잡이 부분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동정심이 분노로 변해있었다.
동료들이 당혹스런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롱슬랭은 벌떡 일어나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용병을 손으로 붙들고는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이어 조심스레 그녀 곁에 쭈그리고 앉아 흐릿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안돼!”
마치 처음 겪는 일처럼,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복받쳐 쏟아진 눈물이 햇빛에 검게 그을린 롱슬랭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은 그에게 어서 이제는 여자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이 어린 여자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의 동공에 비치던 황금빛은 납처럼 창백한 빛으로 이미 바뀌어있었다. 여자는 고통에 겨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녀의 두 손이 롱슬랭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흙이 낀 그녀의 손톱은 롱슬랭의 목덜미를 깊게 할퀴었다. 그녀가 고개를 쳐들자 피로 범벅된 그녀의 입술이 점점 롱슬랭의 입 가까이로 다가왔다.
“너 역시 네 동료들처럼 내 꼴이 되고 말 거다.”
롱슬랭은 소스라치듯 습기로 가득 찬 어둠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윤간당하던 나이 어린 여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매번 깨어날 때마다 롱슬랭은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굴속을 뚫고 도망치고자 시도했다. 헛수고였다. 손끝에 벽이 만져졌다. 다음에는 롱슬랭의 몸 주위로 역한 냄새를 풍기는 축축한 물이 손끝에 닿았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기적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교황 특사의 포로였고 죄수였다.
포로로 잡혀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었을 때부터 롱슬랭은 단 한차례도 햇빛을 보지 못했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해졌고 굶주림에 지친 가운데 차가운 물속에 두 다리마저 잠겨있었지만, 가까스로 돌벽을 움켜쥔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롱슬랭은 있는 힘을 다해 두 발을 한데 모으려 애썼으나 전날부터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자신이 죽인 이들이 유령이 되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특히 알 킬할에서의 일들이 악몽 속에 재현되면서 그로 하여금 공포심에 떨게 만들었다.
나이 어린 양치기 여자를 집단 강간한 일과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들이 겹쳐지면서 포로로 붙들려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 나와 궁수들에 의해 화살을 맞고 죽어가던 붉은 두건을 쓴 여인네들의 처참한 표정들이 어른거렸다. 그는 악마들(djinns ; 아랍어로 귀신, 유령)을 이끌던 우두머리였다.
성지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무서움에 떠는 아이들까지 씨를 말린 악마 중의 악마였다.
숨 막힐 듯이 소름 끼치는 공포에 시달리던 롱슬랭이 잠에서 깨어날 때는 악취가 진동하는 물속에 코를 박고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에 갇힌 사나운 짐승처럼 절망에 빠져 으르렁대던 그가 간혹 몇 시간 동안 잠자코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지옥에 던져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 거리나 길이의 옛 단위. 1 뜨와즈(toirse)는 약 2(1.949) 미터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