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83화
제2부 22-4
예루살렘
1232년 11월
롱슬랭은 소스라치듯 깨어났다. ‘깨어나라’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뿐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잠을 청하거나 무엇을 더듬어 찾아보는 일마저 시들해졌다. 어둠을 가르고 있는 칸막이벽들 사이에서는 기억의 파편들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등을 벽에 기대자마자 등줄기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그러자 또다시 온갖 환영들이 집요하게 롱슬랭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귓가에 깡쥬에흐[1] 고원으로 부는 짙푸른 떡갈나무 잎을 스치는 산들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곳은 소작인들에게 맡긴 땅을 둘러보려고 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던 곳이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사느라 등골이 파인 농부들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 뇌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일터로 나서면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롱슬랭은 그곳에서 지방의 소귀족이라는 지위가 하등 쓸모가 없으며, 자신 또한 지극히 불운한 카데[2]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날조차 불확실하다는 걸 점점 깨달아갔다.
갑자기 감정이 흔들렸다. 베흐동 계곡[3]의 차갑고도 푸른 물살이 쏟아내는 물줄기가 얼굴 위를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시원한 물을 맘껏 들이켜고 싶은 생각에 롱슬랭은 입을 크게 벌렸다.
불쌍한 영혼은 점차로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돌연히 어렸을 적 죽은 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여인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그에게 팔을 뻗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고통이 롱슬랭의 목덜미를 잡았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역겨움이 진동하는 물이 고인 우물 바닥을 향해 끓어오르는 가래를 뱉으면서 롱슬랭은 소리를 질렀다. 랍비의 쉰 목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세계로 되돌려놓았다.
“자네는 물에 빠져 죽으려 하나? 스스로 죽고자 하는가?”
프로방스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어느 것 하나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자네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네. 이제 자네에게 행운은 더 이상 없을 것이네.”
놀란 표정으로 롱슬랭이 고개를 돌려 랍비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그걸 어떻게 아는가?”
느릿느릿하면서도 가라앉은 마이모네스의 목소리가 어둠을 밝히는 양초의 불꽃처럼 점점 높아져 갔다.
“천체를 차지하고 있는 해와 달, 별들이 일러준 것이라네.”
[1] 깡쥬에흐(Canjuers) : 프로방스 지방에 위치한 약 800미터 고도 위에 자리한 고원지대.
[2] 집안의 막내이자 전쟁에 뛰어든 젊은 병사.
[3] 프로방스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고흐쥬 뒤 베흐동(Gorges du Verdon)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