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88화
제2부 23-2
영국
웨스트 컴브리아
달톤 원자력 연구소
지금 현재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실험실 문이 열렸다. 요상하기만 한 이리와 함께 젊은 남자가 실험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요?” 이리인 그녀가 소리치듯 물었다. “경보 사이렌이 울리다가 그쳐서 무슨 일인가 와봤어요.”
“응, 실험이 폭주하는 바람에.” 훼인스워드는 점잖게 대꾸했다.
만티네아 박사는 벌컥 화를 냈다.
“참 어처구니없네요! 모든 걸 사고로 돌리시는데, 당신은 제 이야기에 아예 귀를 닫고 계시군요. 다행히 실험실 안에 안전 설비가 잘 갖춰진 탓에 위기를 모면한 겁니다.”
훼인스워드는 박사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만 기다려줘요. 로봇을 작동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30초요,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알았다니까 그러네.”
“더 이상 요구하지 마세요! 난 어떠한 위험도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훼인스워드는 이리에게 사인을 보냈다. 여자는 훼인스워드가 뭘 말하려는지를 짐작했다. 그녀는 엔지니어에게 조용히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귀속에 대고 중얼거렸다.
“목을 졸라 사람을 즉살하는 방법이 열두 가지나 돼. 난 그 가운데 세 가지를 알고 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내 말 알아듣겠어?”
“당신 미친 거 아냐? 우리 모두가 지금 죽게 생겼다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엔지니어가 대꾸했다.
“난 당신에게 로봇을 작동시키기 전에 단 몇 분 간만을 기다려 달라 한 거요.” 훼인스워드가 박사에게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여자 살인마는 소리를 질러대며 두 손으로 엔지니어의 힘줄 돋은 목을 잡고는 있는 힘을 다해 졸라대기 시작했다.
조종 계기판 앞 화면에 표시된 시각이 바뀌면서 숫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덩달아 붉은 막대그래프들도 연신 오르내렸다. 훼인스워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마지막 시도가 우주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그에게 현시시켜 주던가 아니면 그가 운명에 따라 조종했던 모든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주던가 그도 아니면 그가 설립하고 이바지한 연구소를 한순간에 날려버리든가 하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10초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엔지니어는 이리저리 몸을 뒤틀면서 이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7초 남았다. 붉은 막대그래프들이 화면에 표시된 상한선에 이르렀다. 훼인스워드는 넋 나간 사람처럼 시간과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30년이 더 된 검은 템플 기사단 집회소에 그는 서있었다. 집회소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찢긴 흰옷을 걸친 채 그들 앞에 서있었다. 싸늘한 표정을 한 하얀 유령들이 그가 서 있는 주위를 떠돌았다.
비밀 결사체 입회에 따른 세례식
의장의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꽂혔다. 의장의 목소리는 그의 모든 신경계통을 건드리듯 카랑카랑한 음조를 띠고 있었다.
그대는 우리 조상이 세운 집회소에 입회하는 것에 동의하였노라.
진리는 무덤 속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조이니라. 형제여! 어둠으로부터 나오는 내 말을 잘 들을지어다. 진리는 전능함이며 영광이고 말씀이 이뤄지기 전부터 존재했노라. 진리는 광명이 아니니라. 진리는 곧 어둠이고 암흑이니라. 진리는 지상의 어두컴컴한 내부에 존재하며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것만이 우리 수도회의 목표이니라. 그것만이 최초의 단장으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사명이니라. 무덤 속에서 진리를 꺼내 든다는 것은 인간에게 영원한 자유를 허락한다는 뜻이니라.
내 말 알아들었느냐? 형제여! 무덤의 진리를 꺼내 들고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참된 광명을 전해주도록 하여라. 그것만이 오로지 최후의 목표가 되어야 하느니라.
4초.
훼인스워드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태풍의 눈 한가운데 있었다. 이 전대미문의 강력한 힘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는 뚫어져라 온 실험실 안을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철판으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 성스러운 인물의 출현을 목격하였다.
일은 이미 결판났다. 모든 일들이 끝장날지 어떨지는 곧 판명될 것이다. 그 역시 추호도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1초. 엔지니어는 꼼짝 않고 두 눈을 화면에서 떼지 않았다.
0초. 붉은색 직사각형 표지 하나가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1초. 파란색 막대기가 눈금 하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만티네아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안정화 상태로 진입하는 군!”
훼인스워드는 굳이 전자 제어판을 쳐다볼 필요도 없이 역류하고 있는 반발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덧없어지는 순간에조차 오직 완성된 상태를 향한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도 에너지 사출을 위한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신의 계시에 따른 경이로운 상태, 그가 바라던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