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화신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104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2부 28-2



예루살렘

1232년 11월



우물



롱슬랭은 허공 속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허공은 온통 흰빛뿐이었다. 흰빛은 이젠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확약과도 같았고, 이제야말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언약과도 같았다. 그들은 롱슬랭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특사는 롱슬랭의 자백을 유보한 채 사형 집행도 연기했다. 롱슬랭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흰빛이 롱슬랭을 둘러쌌다. 흰빛은 자애로우면서도 정신을 한없이 고양시키는 자양의 빛으로 떠올랐다가 알 수 없는 공모에 가담하게 만드는 듯했다.


붉은 점이 수평선에 떠올랐다. 미세하면서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크기로 점점 확대되어 갔다. 붉은 점은 롱슬랭을 환영하지 않았다. 붉은 점은 점점 커져가면서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점은 얼룩이 되었다. 붉은색은 피로 바뀌었다. 그가 흘린 피였다.


롱슬랭에게서 다시 신체적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것이 그를 괴롭혀대기 시작했다. 피는 모든 자신의 존재를 사방으로 튀게 만들었다. 터질 듯이 솟구치는 붉은 피는 수천 개의 빛을 번쩍이는 혈관을 타고 흘러 그 고유한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롱슬랭은 다시 깨어났다. 우물 안이었다. 이제 그는 의식을 다시 깨울만한 힘마저 다 소진한 상태였다. 꼿꼿함도, 자존심도, 오만함이나 혈기마저 모든 것이 다 꺾이고 말았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추스를 힘마저 남아있질 않았다. 그는 단지 꺾이고 부러진 나무 같은 존재나 다를 바가 없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던 롱슬랭이 왼쪽 십자가에 못이 박혀있던 엄지손가락에서 바스러져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되살아나자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밤 껍데기처럼 딱딱하게 눌어붙은 피딱지가 체형의 고통을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두 다리를 뻗은 상태에서 벌거벗겨진 맨발의 발바닥이 미끄러운 바닥에 닿자 불에 덴 듯한 통증 또한 되살아났다. 밤사이에 무언가가 바뀌었다. 우물 안에는 더 이상 물이 없었다.


“지옥으로 돌아온 걸 축하하네. 기독교도여!”


롱슬랭은 랍비의 목소리임을 알아챘다. 이젠 이 목소리만이 그에게 희망을 일깨워 주는 친숙한 목소리로 남아있었다. 그가 유대인인가 아니면 이슬람인 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야말로 랍비는 그와 더불어 유일하게 고통을 나눌 동반자가 되었을 따름이다.


“물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자네가 저 위에 있는 동안 그들이 물을 다 퍼냈다네. 아마도 벌레들이 득실거려 그리 한 모양일세. 아직도 많이 아픈 모양인가 본데…….”


롱슬랭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무슨 연유로 그들이 자네를 고문한 것인가?”


“특사는 알 킬할에서 약탈한 노획물들을 감춰둔 곳을 알고 싶었던 게지.”


“자네는 그걸 알고 있는가?”


프로방스 사내가 냉소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와 함께 한 이들은 틀림없이 노획물들을 분산시켰을 것이네. 그들이 그걸 차지하려고 나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것이 오히려 놀라울 따름이라네! 특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악의 화신이 틀림없네. 그는 마치 즐기듯이 사람을 고문하는 악마일 뿐이라는 생각만 드네.”


“그를 불쌍히 여기게나. 왜냐면 그 악마 역시 영혼을 잃어버린 자들의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클리포트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라네. 하지만 자네를, 만일 신이 자네를 수없이 고문당하게 만든다면, 만일 신이 우리를 고통 속에 다시 가둬놓는다면, 그것 역시도 신이 의도하는 바라 할 수 있겠지.”


롱슬랭은 자신의 이마에 손이 얹히는 것을 느꼈다. 마이모네스는 천천히 또박또박 한 음절씩 끊어서 이야기했다.


“운명은 결코 좌초되는 법이 없다네.”


프로방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듯 펄쩍 뛰었다. 체형을 당한 손의 통증이 다시 몸 구석구석에 퍼져갔다. 관자놀이를 후벼 파는 통증이 재현되자 굶주린 개가 이리저리 날뛰듯 울부짖었다. 랍비는 입을 롱슬랭의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는 살아남을 거야.”


롱슬랭은 의식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아울러 새가 날개를 파닥이는 듯한 살랑거림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랍비가 그에게 하는 말의 끝부분은 더 이상 듣지 못한 채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랍비는 중얼거리듯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지하 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