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스타

소설 『검은 템플 기사단』 109화

by 오래된 타자기


제2부 29-3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지금 현재


가브리엘에게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밤이 그렇게 흘러만 갔다. 아침 일찍 파리 북 역에 나타난 앙투안에게 국경수비대 동료들이 비즈니스 좌석표 한 장과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다. 봉투 상단에는 내무부라 적혀있었다.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이동한 뒤 줄을 서서 기다림 없이 동료들이 안내하는 대로 출국장과 함께 입국장이 설치된 곳을 재빠르게 통과하여 짐 검색대 앞에서 가방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줄을 섰다. 그의 신분에 따른 특권이었다. 여권 심사가 재빨리 이뤄진 것은 디지피엔이 그의 신분을 미리 통보해 준 덕분이었다.


1등 칸 손님을 위한 대기실에서 커피 한 잔을 들이키고는 조간신문들을 대충 훑어본 다음 바로 기차에 올라탔다. 유로스타를 안 탄 지가 어언 1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런던 역시 안 가본 지가 그쯤 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약간의 흥분마저 일었다. 하지만 내내 아무 연락이 없는 동거녀가 짜증 나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기 직전 통로에서 앙투안은 가브리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바로 메시지로 넘어갔다. 그는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처음보다 훨씬 더 강렬한 메시지였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는 즉시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떠날 것이라 약속했다. 그리고 그녀가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이며, 자신의 아내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앙투안은 감촉이 부드러우면서 푹신한 좌석에 자리 잡고 앉아 다른 승객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출근하는 비즈니스맨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들은 좌석에 이미 자리 잡고 앉아 컴퓨터를 꺼내놓고는 열심히 좌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아주 달콤한 무기력 증세가 그를 엄습했다. 가끔은 호사스러움이 편할 때도 있었다.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유로스타 여승무원이 미국 여배우인 샤를리즈 테론(샤론 스톤이란 이름을 비틀어 만든 고유명사 조어)과 하도 닮아서 하마터면 실제 그녀인 줄 착각할 뻔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그에게 아침식사 메뉴판을 내밀었다. 마치 비행기 안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좌석 간 간격도 넓다 보니 기다란 다리를 쭉 뻗었는데도 전혀 지장을 못 느꼈다.


유로스타가 점점 속도를 내자 목까지 차오르던 성마름도 차차 가라앉아갔다. 단짝들하고 프랑스와 영국 간 해협인 망슈 해협을 건넌다고 칼레에서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젊은 시절의 추억도 이젠 아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이젠 이국에 대한 어떤 향수도 남아있질 않았다. 젊은 시절 버스를 타고 장시간 영국을 향해가며 꼬르륵거리는 뱃속을 빵, 치즈, 햄 따위로 채우면서 8시간에 걸쳐 런던에 도착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게다가 버스가 페리에 실려 바다를 건너는 게 아니라 런던 수도 한복판과도 같은 터널을 통과하는 바람에 약 2시간 가까이를 먼지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하느님은 여왕과 유로터널을 지켜주신다.



식감이 바삭바삭한 파이를 베어 물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앙투안은 봉투 속에서 서류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봉투 안에는 유태인 학교에 설치된 카메라에 찍힌 범인들 사진들과 제트 여객기가 날아간 항로를 표시한 지도가 들어있었다.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관련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유일한 단초라 할 수 있는 제트 여객기의 항로를 곰곰이 추정해 보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대체 무슨 이유에서 제트 여객기가 칼라일에 일시 착륙을 해야만 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말라빠진 뼈다귀들 이상으로 무엇인가가 있지 않다면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파 드 칼레(유로터널이 시작되는 프랑스 서북부 도시)가 가까워지면서 평탄하면서도 단조로운 풍경이 유리창 밖으로 한없이 펼쳐졌다. 그러자 누그러졌던 성마름이 다시 도졌다. 그에게는 영국 땅에서 수사에 착수할 만한 어떠한 법적 근거나 권한도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완전히 재수 없이 똥 밟은 격이나 다름없었다. 어제 가브리엘이 그의 아파트를 나선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삶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로스타가 망슈 해협 아래 해저터널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그의 마음 상태도 도로 우울해져만 갔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불평분자에다가 카페인에 취해갈 것이 틀림없었다. 프랑스 대사관 직원이 그를 마중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에게 호감을 살만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기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제 런던까지는 20여 분을 남겨놓고 있었다. 해저터널을 빠져나온 유로스타는 영국 들판을 가로질러갔다. 푸르고 축축한 들판이 계속 이어졌다. 키웨스트의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은 백사장이 기억 속에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영국에 들어왔으니 이제 영국 통신 체계로 바뀔 찰나였다.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혹시 가브리엘이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을까 궁금해졌다.


전화기 몸체가 부르르 떨리더니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아이콘이 화면에 뜨면서 동시에 탈칵 소리가 났다. 열에 들뜬 듯한 표정으로 그는 메시지 아이콘을 누르면서 디스칸투스(교회 성가)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메시지는 가브리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뚱보 형제가 보낸 메시지였다.


내 떼세에프![1] 예전에 야드라 불렸던 영국 대 집회소의 형제가 자네와 협력할 것이네. 그가 자네를 도와줄 것이네. 내가 그에게 이 일을 부탁했네. 난 상당히 호전되었네. 자네가 궁금할까 봐 이야기하는 거라네.


메시지를 읽으면서 앙투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병원 침상에 누워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며 간호사들에게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뚱보 형제가 떠올랐다. 앙투안은 좀 더 유의 깊게 메시지를 다시 읽어갔다. 메시지는 어떤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새로울 것마저 없는 메시지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뚱보 형제의 메시지에서는 따뜻한 인간미가 물씬 묻어났다.


게다가 뚱보 형제가 이야기한 영국 형제애 소속 회원의 조력은 그에게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앙투안 마르카스가 소속된 순종 단체인 동방 대 지부는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으로 런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였지만, 간계와 술책에 능한 영국 형제들을 대놓고 경멸하고 나섰다.


앙투안은 영국 프리메이슨 단원들처럼 특별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석공(프리메이슨 단원을 지칭하는 또 다른 명칭)들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왕위를 존중하는 이들이었고, 그 역시 형제애에 입각하여 그들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했을 뿐이다.


스피커에서 조금 후면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기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앙투안은 서류봉투와 짐 가방을 챙기면서 한 번 더 동거녀에게 전화할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세 번씩이나 전화해서 그녀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더해 수모까지 당할 필요는 없었다.



그밖에 또 무엇이 그녀를 악마로 만들었는가!



그는 객차 출구 쪽 플랫폼에서 그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샤를리즈 테론에게 짧게 답례하고는 유리 천장으로 뒤덮인 웅장한 역사를 올려다보았다. 찬탄이 절로 나오는 건물이었다. 낡고 떠들썩한 워털루 역(이전의 유로스타 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플랫폼 끄트머리로 상당히 높은 허공에 서로 다른 색상을 띤 거대한 크기의 고리 여섯 개가 서로 얽혀있는 형태로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웬 추상작품이 걸려있나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 어떤 작자가 저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끼어들었다. 그는 여름 올림픽 개최지가 런던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앙투안은 재빠르게 검색대를 통과하여 출구 쪽으로 빠져나왔다. 출구 앞에는 무리를 이룬 한 떼의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나오는 여행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세 남자가 각기 이름이 적힌 사인보드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좀 더 앞으로 걸어갔다. 대사관 직원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기다리는 중인 것 같았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브리엘이 보낸 것이 아니라 역시 뚱보 형제의 메시지였다.


오늘 아침 일찍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가 영국 수상 관저에 조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네. 자네의 수사 때문이라 하니 최대한 신중하기 바라네.






[1] 본문의 나의 떼세에프(Mon TCF)란 말은 핸드폰 문자메시지에서 사용하는 축약어로서 ‘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형제여(mon très cher frère)’라는 뜻의 경칭에 대한 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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