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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Aug 03. 2023

도상의 주제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84화

[대문 사진] 생 사뱅 쉬흐 갸흐탕프 수도원 교회 프레스코 화


교회 건물벽에 그려 넣을 성화들을 위하여 화가가 임의로 선택한 주제로 그릴 수 있는 자유는 아직 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림의 주제는 성서적 규율에 위배됨이 없어야 했고 게다가 논리 정연하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후진은 교회 내부의 주요한 공간 가운데에서도 아주 성스러운 장소에 해당했죠. 따라서 이곳에 그려넣을 성화는 후광으로 둘러싸인 권좌에 앉아있는 위풍당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으로써 인정받은 것만 가능했습니다.


원을 4 등분한 형태의 둥근 천장은 하늘을 상징하는 곳이자 하느님이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이어야만 하는 까닭에 몹시도 까다로운 규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요한 묵시록(4장 1절-11절)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옵니다. “하늘에는 한 옥좌가 있고 옥좌에는 어떤 분께서 한 분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있었습니다. 옥좌 둘레에는 좌석이 스물네 개 있었으며, 거기에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묵시록에 따른 하느님의 영광이 띠고 있는 이 성스러운 빛깔들에 관하여 화가들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할지를 놓고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했죠. 또한 그리스도의 옥좌 둘레에 자리 잡은 24명의 원로들과 고대로부터 4명의 복음사가들로 전해내려오는 날개 달린 네 동물들을 어떻게 묘사할 지도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성화가 카탈루냐지방에 위치한 타울(Taüll)의 산클리멘트 교회 후진에 그려져 있습니다. 간혹 교회 후진 안쪽 내밀한 곳에 그려진 성화의 아랫부분에서 조심스럽게 마리아가 아들의 영광스러운 현현(顯現)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타울에 소재한 또 다른 성당인 산타 마리아 벽화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축성받은 성모 마리아가 등장하기도 하죠.


<동정녀 마리아>, 타울(Taüll) 산 클리멘트(Sant Climent) 교회 후진 벽화, MNAC, 바르셀로나, 스페인.


<위풍당당한 예수 그리스도>, 타울(Taüll)의 산 클리멘트 교회 후진 천장화, MNAC, 바르셀로나, 스페인.


영광의 주제는 항상 환호하는 다양한 등급을 지닌 천사들[1]이 출현함으로써 완성됩니다. 교회의 후진과 내진 가장자리를 둘러싼 벽들 위에 그려진 열 두 사도들 역시 주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성인이나 성녀들의 성골함을 숭배하는 교회들에서는 순교를 당해 죽어가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그들의 삶에 기초한 도상들을 표현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서쪽, 즉 해가 지는 방향은 하루가 저무는 곳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 최후 심판을 펼치는 세상의 종말을 상징하죠.


교회의 회중석 벽들은 양쪽 모두 병행하여 전통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구약과 신약의 내용들을 압축한 벽화들로 채워졌습니다. 구원 받은 이들을 묘사한 장면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한편으로 론 강가에 위치한 비엔느(Vienne) 지방의 생 사뱅 쉬흐 갸흐탕프(Saint Savin sur Gartempe) 성당에는 둥근 통 형 천장이 구약성서의 장면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통 형 천장은 프랑스에서 최초로 설계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생 사뱅 쉬흐 갸흐탕프(Saint Savin sur Gartempe) 수도원 교회의 둥근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 화(부분), 1100년경.


대홍수로 말미암아 물 위에 떠있는 네모 반듯한 배 안에는 송장들로 가득합니다. 바이킹의 드라카르(drakkar)를 연상케 하는 뱃머리는 개의 형상을 한 용머리를 하고 있고 눈빛은 비둘기를 잡아먹고 싶어 침을 흘리는 듯하죠. 용머리 위를 날고 있는 비둘기는 대홍수가 끝났음을 암시해줍니다.


대홍수가 끝나자 갑판 위에서 ‘방주의 덮개를 걷어내고 있는’ 2명의 인물은 노아를 그린 것일까요? 아니면 물에 익사하기 전에 노아의 방주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했던 진위가 의심스러운 유대인의 전설에 따른 2명의 거인 족 네필림(Néphilims)을 묘사한 것일까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로마네스크 회화는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다양한 도상들을 취합함으로써 그에 따른 기법들도 다양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띠어갑니다. 이제 회화는 건축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다양한 작품들이 상호 간의 영향관계에 놓이는 국제적인 양상이 현저해지면서 회화작품 역시 작품을 산출한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나아갈 필요는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술가들 자신에게 있어서나 예술적 흐름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였죠. 왜냐면 로마네스크 화가들은 건축가들이나 조각가들보다 더 많은 숫자가 여전히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몇몇 문화예술의 중심지들이었던 수도원들과 주교좌 도시들은 회화작품의 모델이 될만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또한 이러한 로마네스크의 전형이라 여겨진 작품들을 유럽 각지역에 퍼뜨리는 데에도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1] 천사들은 계급에 따라 총 9품으로 구분되는데, 1품 치품천사 (Seraphim)로부터 시작하여 지품천사 (Cherubim), 좌품천사 (Thrones), 주품천사 (Domination), 역품천사 (Virtues), 능품천사 (Powers), 권품천사 (Princedoms), 대천사 (Anchangels), 그리고 9품 천사 (Angels)로 내려갑니다.




생 사뱅 쉬흐 갸흐탕프(Saint Savin sur Gartempe) 수도원 교회 둥근 천장에는 1100년경에 제작된 프레스코 화가 빛을 발합니다.
갸흐탕프(La Gartempe)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생 사뱅(Saint Savin) 수도원 교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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