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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l 03. 2017

의뭉스러운 징후들

굴이 따끔거린다. 쓱쓱 문질러본다. 버석버석하다. 더하면 하얀 각질이 우수수 떨어질 판이다. 거울 속 얼굴은 때아닌 단풍잎처럼 울긋불긋하다. 아침에 잔뜩 바른 크림이 무색할 정도로. 푸석한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번들거려 산유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건조하다 못해 간지러워 긁다 보니 목 주위가 빨갛다. 주름질까 봤더니 ‘울버린’의 손에 할퀸 듯 살갗이 켜켜이 일어나 있었다. 



덕꾸덕한 날씨 탓에 습하고 후덥지근했다. 이럴 때일수록 화장품 몇 개쯤 덜 바른다고 해도 끄떡없을 법 한데, 가뭄에 논밭이 쩍쩍 갈라지 듯 메마르다니. 해괴한 일도 다 있다. 뭐라도 잘못 먹은 것일까? 며칠 간의 행적을 되짚어본다. 하루에 생수 한 통은 챙겨 마셨고. 식사도 배부를 정도에서 끝냈다. 아이스크림이나 주스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시도 때도 없이 갈증에 시달린다. 식사 전후만 아니라 새벽에도 찾는다. 화장실도 자주 간다. 야뇨증 환자처럼 단잠에 아랑곳없이 벌떡 일어난다. 예전만큼 커피맛이 별로다. 늘 애용하는 원두도 그냥 그렇다. 혹시 잘못 내린 게 아닐까 싶어 카페를 찾았지만 시큰거리기만 하다. 입안이 텁텁한 것 같아 마무리로 물 한잔 들이켠다. 



상한 점은 또 있다. 가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달달한 맛이 그립다. 나는 미각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단맛이다. 초콜릿도 쓰디쓴 다크만 먹는 사람이다. 지난 주말에는 갑자기 팥빙수가 먹고 싶어서 전문점을 돌아다녔다. 한 숟가락 먹어보니 생각만큼 맛있지 않아 몇 번 뜨다가 말았다. 어제는 오밤중에 뭐가 먹고 싶어서 한참을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막상 먹으려고 해도 혹시 살찔까, 얼굴이 보름달만큼 부을까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주린 배를 달래 가며 애써 잠을 청하고 말았다.  



침마다 일어나는 것도 영 시원치 않다. 어깨에 누가 올라탄 듯 묵직하고 목 주위는 경직돼 고개 돌리는 것조차 힘겹다. 눈을 뜨곤 하나, 둘, 셋 하며 몸을 세워보지만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옆으로 구르거나 혹은 다리를 들어 올려 반동으로 일어서곤 한다. 밤마다 파스 붙이는 게 일이다. 운동으로 풀어볼까 했으나 역시나 목만 삐끗하고 말았다. 대단한 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잠시 쉬어 보려고 해도 금세 해야 할 일에 눈이 간다. 어느새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혹시 누군가 창 밖에서 보고 있다면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스스로 쳐놓은 굴레가 많다. 참 힘겨운 인생이다.



적거리니 비로소 문제가 보인다. 현재 내 상태는 메마르다 못해 수분이 부족하고 당에 의지할 정도로 기력이 떨어져 있다. 온몸이 쑤시고 결릴 수밖에.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태생적인 결여가 이제야 드러난 것일까?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표피를 뚫고 나와 반란하는 것일까? 제발 나 좀 찾아달라고. 무언가 간과했거나 잃어버렸지 생각해본다.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풍족한 것은 없을뿐더러 부족한 것은 너무 많은 데 어디서부터 갈피를 잡아야 할지. 그렇다고, 그 징후가 어떤 불만을 향한다고 볼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불평과 싫증을 떠올리지 않았다. 현재 내 삶에 만족하는 편이다.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생채기를 건드리는 것조차 두렵다. 근원을 파헤치는 것보다 차라리 관통해버리자. 그 모든 것이 어떤 욕망을 향하고 있다면. 고인 물처럼 정체되고 썩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조금씩 나가길 바라는 것이라면. 지금 내 상태는 목마른 화초인지 모른다. 꽃 피우기 위해 물을 더 달라고 채근하는 것이다. 뿌리 깊숙이 영양분을 끌어올리려고 하는데 온몸이 굳어서 힘겨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당의 힘으로라도 조금씩 뻗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징후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동안 나는 드러내지 않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꿈, 소망, 숙원, 바람. 어떤 것을 덧붙여도 적합하고 쏙 드는 말이 없다. 뭐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었다. 단순히 마음 깊숙이 박힌 꺼지지 않는 불빛 정도였다. 내 숨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그것이 있어서 적어도 행복하다 생각했다. 쉽게 포기하거나 나락에 빠지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 갈망은 불만이 될 수없다. 후자는 할 수 없다는 부정의 기운으로 가득 찼지만, 전자는 어떻게 도달하려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 빛을 지표 삼아 쉼 없이 걸어갈 것이다. 물론 그 여정이 항상 즐겁고 설렜던 건 아니다.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폭우를 만나 잠시 피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끌어 주기도 하고 어쩌다 마주친 이가 느닷없이 밀치는 바람에 저 멀리 나가떨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수레바퀴처럼 겪고 또 겪었다. 쉬운 게 없다. 늘 마음속엔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비친다. 



동안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아무 탈 없이 지나가는구나 했다. 어느새 발 없는 천리 말처럼 우울과 불안이 성큼 달려와준 셈이다. 건조증, 갈증, 단맛 결핍과 근육통으로. 이번엔 좀 거친 녀석들이 온 셈이다. 어쩌면 곪아서 한껏 독을 품은 종기처럼 어느새 엉겨 붙었는지 모른다. 이젠 자기 좀 보라고 성가시게 하고 있으니 그냥 둬서는 안 될 것이다. 처방전이든 민간요법이든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을 의심하는 걸까? 내 의지? 아니면, 나의 청사진?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무(無)에 대한 의구심. 어차피 어떤 것도 없었다는. 고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무심(無心).



는 원래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한번 백 점을 맞으면 계속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책하고 스스로를 못살게 군다. 좀 더 완벽해지고 싶은 마음, 그래야 안심이 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그랬던 내가, 수 없는 시행착오 끝에 얻은 건 조금씩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다. 완벽과 비움의 사이에서 인내의 사리가 생길 판이다. 그런 내가 무심하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린다. 빛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긍정과 자족이란 이름으로부터 떨궈진 부스럼과 찌꺼기. 조바심과 긴장이다. 바라는 것을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지금까지 버티고 견뎌온 것이 수련이라면 수련이다. 그럼에도 사람인지라 지칠 때가 있다.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한다. 휴대폰이 떨어져 액정이 깨졌지만 고치지 못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나가 수리하고 들어오면 족히 2시간이다. 하루에 할당된 혼자만의 시간이다. 필 받으면 A4용지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다. 그 시간은 매일 아침 눈뜨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다. 살아가는 의미를 메우는, 나를 알고 찾으며 좀 더 괜찮아지려는 노력이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 헛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놀면 뭐하겠는가? 하고 싶은 거라도 하는 게 낫지. 



렇지만, 가끔 마음이 무겁다. 그 모든 것이 무의미 해질까 걱정된다. 그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갑자기 놓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카페에 다녀오는 날, 마주치는 동네 지인이 ‘어디 다녀와요?’라 물을 때 가장 난감하다. 글 쓰러 카페에 갔었다는 말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다. 얼마나 팔자 좋은 일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론 그렇다. 반면, 내 꿈을 위해 시간 내고 투자하는 거라면 결코 아깝지 않은데.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한다. 누군가의 궁금증, 격려나 걱정, 모두 귀찮다. 조용히 속으로 삭힐 뿐이다. 아마 그 건조증과 갈증, 단맛 결핍과 근육통은 스스로 키우고 진단한 처방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쉿, 말하지 말자. 참자. 무조건 열심히 하자. 알아주지 않아도 언젠가 빛 볼 것이다. 어쩌면, 지금 상태는 의심병인지 모른다. 앞이 명료하지 않고 의뭉스럽다고. 심지어 갈망조차. 



절망 (로이 리히텐슈타인, 1963)

                        





얼마 전, <생활의 달인>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안 된다, 못하겠다 하지 말고 그냥 한번 해보세요. 될 때까지 쭉. 그러면 되겠지, 안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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