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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l 10. 2017

그것도 나라네

덥지근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 평 남짓한 감옥이라도 갇힌 것처럼 갑갑하다. 이건 흔한 일이 아니다. 평소엔 생각이 너무 많아 문제였다. 딴짓을 해볼까 싶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앨범 폴더를 열어본다. 어제와 그제, 몇 주전 찍었던 것이 좌르르 흘러내린다. 대부분 가족사진이다. 여행지에서, 경치 좋은 곳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이 예쁘고 기특해서 찰칵! 아들이 장난 삼아 막 찍어 댄 것도 있다. 초점이 맞지 않아 우스꽝스럽고 조잡스러운 게 대부분이다. 우연히 찍힌 신체의 일부나 장난감이 그럴싸한 피사체로 보이기도 했다. 얻어걸린 건지 아니면 타고난 예술적 감각이라도 있는 건지. 그중에는 좋은 문장이나 책의 일부도 있다. 단기 기억 능력이 떨어지는 관계로 뭔가 찍어두는 습관의 일환이다. 이런 글귀가 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거야.” 재즈 피아니스트인 ‘델로니어스 몽크’의 말이다. 때마침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맞다. 새로운 꺼리는 어디에도 없다. 내 삶이 곧 내 이야기인 걸. 그것을 벗어난 건 단 한마디도 떠들 수 없다. 앨범 속 사진들은 지금 나에게 소중하고 골몰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내가 추구하는 지향점인 셈이다. 



쉬운 건, 정작 나 자신은 없다는 것이다. 나란 존재는 프레임 안에서 벗어났다. 그저 피사체를 응시하고 주목하는 시선으로 감지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찰자로서 주변을 바라보고 채색함으로써 내 이야기라고 말한다. 내가 빠진 이율배반이 내 일상인 것이다. 화자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엄마와 작가는 닮은 구석이 있다. 비록 무대 위에선 생략됐으나 누군가를 그렇게 만드는 것에 보람과 희열, 의의를 둔다. 그게 창조자의 만족이다. 고로, 자가당착이란 이면의 역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슬슬 자기연민에 빠진다. 웃기고 슬픈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늘 인터넷이나 쇼핑몰에서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정작 입어본 적이 없다.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병아리처럼 샛노랗거나 산뜻한 핑크 빛 린넨 드레스를 입는다면, 입에 얼음이라도 문 듯 속이 다 시원할 것 같다. 그러나, 그걸 입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애들 쫓아다니고 안아달라고 조를 경우를 대비해 어떤 각도에서도 신경 쓰이지 않는 옷이 최고다. 그러니, 정작 옷장에 걸린 건 길이와 색상 별로 제 각각인 청바지나 면 티다. 가끔씩 멋진 옷을 입고 우아하게 아이와 손잡고 걸어가는 이를 보면 부러운 나머지 괜히 심술이라도 부리고 싶다. 저 상황이 도무지 올 수 없다는 건 한편으로 내가 그렇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모양새보다는 함께 있는 이들을 더 신경 쓰느라 안 되는 것이다. 누구한테 하소연해 봤자 본전도 못 건지는 소리다.



런 게 앙금처럼 남아 어딘가에 켜켜이 쌓이고 있나 보다. 풀지 못하거나 간과한 채 넘기면, 가끔씩 뜬금없는 행동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 불똥이 내 주변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도 튈 수 있는 게 문제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즘 내가 읽는 만화책이 있다. 다 읽고 딱 두 권 남았는데, 이상하게도 바로 앞 권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주위를 살펴보니 책장 옆 소파에서 어떤 아저씨가 그 책을 읽고 있었다. 딱 보아도 두세 페이지밖에 남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그가 그 책을 다시 꽂으면 빌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게다가, 슬리퍼 바람에 한쪽 다리를 꼰 채 벌벌 떨면서 히죽히죽 대는 모양새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십 분이 지나도 책장은 그대로였다. 내가 기다리는 걸 봤을 텐데도 저러는 건 무슨 심사일까? 골려 주려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못된 심보가 발동된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다음 권을 빌려서 나와버렸다. 마침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있었기에 순차 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선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코 앞에 있던 다음 권이 없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일 것이다. 나오면서 내게 이런 야비한 면이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여태껏 내 신조가 역지사지였다면 믿겠는가? 괜히 욱하는 바람에 그 말도 함부로 쓸 수 없게 됐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함께 의외로 당찬 구석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상하게도 후회되는 것이 아니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데, 나도 참을 수 없는 게 있구나. 정말 억눌렸던 감정이 펑 터진 것일까?  



끔씩 뭔가 시답잖게 보일 때 괜한 치기와 객기를 부린다. 일상은 무리 없이 돌아가는데 나만 우죽뿌죽한 듯 못나 보인다. 얻는 거 없이 내 에너지만 낭비하는 것 같다. 쳇바퀴 같은 하루라고 투덜댄다. 그렇다고 이 마당에 주인공 타령을 하는 것도 우습다. 창조자의 숙명을 잊었는가? 지휘봉이나 조타를 어디다 팔아먹었던가? 그런 생각은 소모적이다. 변한 건 감정과 자세일 뿐. 컨디션이 좋으면 모든 게 즐겁지만, 어딘가 불편해지면 다 짜증스럽다. 그럴 바에는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같은 하루라도 뭔가 그럴싸하게 여겨야 한다. 주위를 밀착해서 살펴보고 껄끄러운 뭔가를 감지해낸다. 선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 삶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리 보인다. 항상 다니는 똑같은 길도 옆 골목으로 새어보고 옷이나 머리스타일, 하다못해 먹을 거라도 다른 걸 시도해본다. 오늘은 홧김에 ‘샤케라또’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넣고 흔들어서 내놓은 커피다. 내가 간 곳은 달달한 꿀까지 첨가한 터라 꽤 내키지 않은 조합이었다. 첫 모금엔 얼굴을 찌푸렸다. 쓴맛과 단맛이 파도처럼 밀려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나마 가볍게 깔린 거품이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혹시나 해서 한번 더 들이켰더니 이번엔 시큼하고 다크 초콜릿 같은 맛이 다가왔다. 넘길 때마다 다른 풍미를 터트리며 묘한 매력이 넘실댄다. 난생 처음 시도한 맛은 선입견을 넘어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었다. 의심은 설렘으로 다시 즐거운 도약으로 이어졌다. 한번 더 마실 수 있을까? 물론, 충동적인 감정을 누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불시착 같은 호기로움에 물들어가는 내가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그래, 가끔씩 틀을 깨고 나갈 필요가 있어. 



가 창조한 삶인데 무엇이 새롭고 얼마나 다채롭겠는가? ‘델로니어스 몽크’의 말처럼 새로운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듯, 내 건 이미 그 안에 있다. 지루하고 따분하며 가끔씩 종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려 억하심정을 터트려도 어쩔 수없다. 오히려 방점은 그 정해진 삶의 음계에서 어떻게 의미를 담아내느냐에 있다. 훌훌 털어버리고 의외의 방향으로 우회하면 또 다른 나를 만나기도 한다. 다시 조정 키를 잡고 내 안의 그들을 품고 다시 인생이란 항해를 떠나게 된다. 평온한 망망대해를 인내하고,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거친 물결 속에 휘말리지만, 그 필연과 우연을 넘어 결국 낙천적인 나로 돌아간다. 일상의 굴레와 나선형의 소용돌이를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 어떤 지점이든 전부 나였다. 방향은 늘 전방이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 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거야.”
  - ‘델로니어스 몽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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