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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ul 21. 2017

한편으론 중독 인생

든 일을 끝마친 야심한 밤에도 커피 한잔이 간절해진다. 마시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잠 못 드는 밤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후덥지근한 한밤중에 홀로 깨어서 밤새도록 뒤척거리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다. 어제도 바로 그런 날이었고 그런 관계로 새벽 1시경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매 순간 그러는 건 아니다. 오전, 오후, 저녁 일과를 끝낸 약간의 휴지기에 잠깐이다. 그렇다면, 방점은 야심한 밤이 아니라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찍힌다. 어떤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고 난 후 찾는 것이다. 끝냈다는 일종의 보상심리 차원에서 나름의 협상이다. 어떤 위안이나 토닥거리는 격려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커피는 여유 속 무료함을 달래줄 나만의 위로 방식인 셈이다.



때는 맥주였던 적이 있었다. 그땐 누구든지 나를 보면 씩 웃으며 ‘맥주 한잔 해야지?’라고 말하곤 했었다. 업무 후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인파 중 거의 고정 멤버로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나는 업무나 회의에 치이다 못해 원더우먼처럼 일당백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그때 내 별명은 잔다르크였다). 온라인 상에서 모든 서비스 로직을 구현해야 하는 만큼 개발자와 디자이너와의 협업이 무엇보다 관건이었다. 손발이 맞아도 척척 돌아가기 힘든 판에 삐걱거리기 일쑤였다. 일정을 못 맞추고, 기획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서, 에러가 많다고 한바탕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파이팅 후 단숨에 들이켠 맥주의 첫 모금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저씨 마냥 ‘캬’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감정의 골을 털어냈다. 그런 몇 잔이 연거푸 이어지고 약간의 취기가 올라오면, 배려고 뭐고 아랑곳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하소연과 험담을 지껄였다. 아마 당사자가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할지 모른다. 뭐, 그럼 어떤가. 그 날의 속상함을 넘기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라도 하고 나면 다음 날 리셋된 기분으로 의기충천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어제까지 싸웠고 욕했던 인물과도 별거 없었다는 듯 대화를 하고 업무를 주고 받았다. 어찌나 철면피처럼 행동을 하면 지난밤 함께 했던 동료가 기분파라고 놀렸을까. 나는 씩 웃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하자고 부추기곤 했다. 그때의 한 잔은 격렬한 작업장을 버티게 해 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좀 더 과장해서 하루에 그 한 모금 마시기 위해 투쟁하고 쟁취하며 성과를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처럼 힘겨운 싸움을 끝낸 후 찾아온 꿀맛 같은 보상은 맥주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완벽한 휴식이었다. 



러나, 문제는 한 잔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원한 한 모금은 한번 더를 외치며 병과 캔으로 탑을 쌓게 된다. 너무 흥이 난 나머지 더, 더를 외쳤다가 낭패를 본적도 꽤 된다. 아무리 삶의 비타민이라도 종종 늪에 빠뜨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뒤끝이 좋지 못한 것과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 사이엔 뭔가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그와의 어정쩡한 이별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덕분이다. 그는 내가 만난 인간 중 가장 특이한 인물이었다. 자기 멋대로 행동했고, 자유분방했으며, 투명 비닐처럼 속이 훤했다. 뜬금없이 주위로 뛰어들어 내 시선 족족 따라다녔다. 보이지 않는 낚시 줄로 낚인 것처럼 슬금슬금 끌고 가더니 어느새 마주 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간격 사이로 놓인 테이블 위에 맥주가 있었다. 조금씩 홀짝이다 보니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술 한잔 기울이면서 내가 늘어놓는 고민에 늘 잘할 수 있다는 격려를 해줘서 좋았다. 마치 어린애가 그보다 조금 큰 아이를 만난 것처럼, 뭐든지 순수하고 긍정적이었던 함께 있어 행복한 시절이었다. 나는 그가 소울메이트일 거라 생각했었다. 근데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아직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깨달은 건 우리를 엮은 낚시 줄이 너무 팽팽했던 것뿐이다. 그는 어디로 튈지 몰랐고 나는 사방팔방 끌려 다녔다. 어느 날 펑하고 끊어졌을 때 서로를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튕겨져 원점이 어딘지도 찾을 수도 없었다. 갑자기 시작된 것처럼 흐지부지 뒤돌아 선채 각자의 길을 갔다. 많이 울었고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가장 슬펐던 건 우리의 관계가 영혼을 공유한 소울메이트가 아니라 어긋난 집착과 중독증이었던 사실이다.



때 나를 위로했던 건 쨍할 정도로 후련했던 맥주였다. 그에게 배웠던 그 한 잔이 허전한 틈새를 파고들어 식어버린 가슴을 금세 촉촉이 적셔주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한때의 투박했던 사랑을 통과의례처럼 뚫고 지나가야 했다. 살다 보면 별거 아닐지 모를 잠깐 반짝거린 별표에 지나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일어나야 했고, 다시 활기차게 살아야 했다. 어쩌면 삶에 매진하기 위해 마셨다. 보통 목에 축일 정도로 마셨지만 가끔씩 공허하다는 핑계로 초과량을 넘어서고 말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지금도 달리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돌아서서 후회했다. 맥주에 집착하는 것이 허무함을 달래는 행위라면,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을 일정 부분 허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현실은 달라졌다. 맥주의 의미가 성과를 위한 각성제로 바뀌었고, 한편으로는 여유와 나른함을 찾아줄 오아시스로 바뀌었다. 께름칙하게 시작되어 자제할 수 없는 지경의 습관이라면,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맥주와 이별을 고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던 것 같다. 좀 더 생산적인 뭔가가 필요했다. 그게 커피였다. 



피는 흥보다는 여유와 차분함에 어울렸다. 나를 돌아보고 일상을 좀 더 풍성하게 할 사색으로 인도했다. 나는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그걸 잘 정리하고 풀어내기 위해선 커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어떤 자극제 혹은 삶의 윤활유가 됐다. 과연 그거 없이 단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저녁 여섯 시 이후론 마시지 않겠다는 나름의 룰도 가끔씩 어기는 만큼 지금으로선 자신 없다. 그게 집착이지 싶어 슬쩍 두렵기도 하다. 어떤 면에선 그렇게 뭔가에 중독되어 의지한 채 살아왔구나 싶다. 그러나, 커피에 탐닉하는 것은 맹목적인 중독과 다른 거라 위안해본다. 일시적인 감흥이나 휘발해버릴 무언가가 아니라 오랫동안 내 옆에 있어줄 것을 찾는 거니까. 이 세상 모든 이가 나에게 등진다고 해도 끝까지 지켜줄 소울메이트 같은 존재를. 좋은 말로 생산적인 중독이라 포장한다. 가끔씩 커피 한잔에 그런 상념을 끄적거린다. 스마트폰의 메모장이나 작은 수첩에, 시간이 날 땐 노트북을 켜고 적어본다. 그렇게 시작된 또 다른 중독이 바로 글쓰기다.





가끔 이런 내가 못 견디게 싫지만, 대체론 뭔가 미치고 골똘한 내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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