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드는 시골의 밤은 퍽 길다. 더 나은 아침을 위해 달리는 서울과 달리, 시골은 저녁을 위해 존재한다. 동 트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아침을 차린다. 참나물처럼 거기서 거기인 나물과 생선구이가 빠짐없는 반찬을 군말 없이 해치운다. 상을 물리고 어영부영 보내면 점심, 한 바퀴 돌고 잠시 누웠다 일어나 보니 저녁이다. 비로소 삼시 세끼의 늪에서 해방이다.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친 셈이므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TV를 보며 빈둥거리기를 뒤로하고 군말 없이 이부자리를 편다. 피곤한 모양인지 하나 둘 코를 골기 시작한다. 칠흑처럼 어두운 방 안에서 새근대는 소리로 예민해진 신경을 억누르지 못한 나는 한동안 뒤척인다. 정적을 휘감는 새근대는 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불빛 하나 없어 갑갑한 외로움 때문일까? 어떤 생각에 잠깐 빠졌었는데, 그럼에도 이 기막힌 적막감에 조금씩 잠식당한다. 이내 나른해진다. 잠깐 눈을 감았을까? 저 멀리서 소쩍새인지, 올빼미인지 '포오포오'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전설의 고향이 따로 없다. 오싹해진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 밤은, 시골의 야심한 한복판에는 인간적인 것이 없다. 모두 잠들었고, 형광등이나 TV 소리도 꺼졌다. 암순응을 견뎌낸 눈에 들어오는 건, 저 멀리 웅장한 산의 윤곽과, 물과 땅의 경계조차 모호한 시꺼먼 흔적과, 어디선가 있을 생명체의 꿈틀 댐이다. 그것이 자연으로 귀속돼 강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어둠과 벗하는 자연, 시골에 오면 분명 느낄 수 있다. 서울에선 단 한 번도 홀연히 존재하는 자연을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인공의 빛 혹은 인파 속에 있었다. 단숨에 제압할 만큼 압도적인 기운이었던가? 나는 이 적막하고 새까만 어둠 속의 자연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두려웠고, 익숙하지 않아서 낯설었으며, 혹여 해코지를 할까 피하고 싶었다. 인간적인 것을 포용하지 않고 있어서 무서웠다. 나 혼자 맞서기엔 불리했다. 그것은 비밀스럽게 함구하고 버티고 있다. 나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내가 우스운가 아니면 만만해 보이나? 눈짓 하나 끔쩍거리지 않는다. 나 혼자서 시비를 걸고 화내다가 제 풀에 꺾이는 꼴이다. 그것과 대립하다가는 될 일도 안된다. 아침이면 슬며 시 인간 속에 섞였다가 밤이면 나타나 모든 것을 잠재우는 그 힘. 한밤중에 깨어 있는 죄로 괜히 엿보고 만 것이다. 오히려 절대 군림 속에서 일말의 잡초 같은 나를 허용하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문뜩, 자연과 인간에 얽힌 비밀을 깨달은 것은 나만이 아닐까 하는 방종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인간 속의 자연에 익숙한 인간이 홀연한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비롯된 또 하나의 진실은 자연은 그 자체로 완성품이지만 인간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깨닫았던가? 나의 경험은 화장실과 연관된다. 몇 해 전까지 시댁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참고로 이 집은 방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고, 화장실을 가려면 신발을 신고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질러야 한다. 늘 문고리를 잡으면서, 어떤 미확인체와 마주치더라도 휘말리지 않고 냅다 달리겠다고 마음먹곤 했다. 문을 여는 순간, 암흑으로 뒤덮인 풍경이 들어온다. 이내 대청마루에 주저앉아 손끝의 감각 하나로 신발을 찾고 기둥과 벽 모서리를 짚어가며 목표점을 찾아 나선다. 내디뎠다면 절반의 성공이다. 이후의 일은 대체로 생각나지 않는다. 무사히 내 자리에 누웠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사이 나는 자연에 압도된 미물로 잠시 존재했다. 거기서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한들 누구도 찾지 못할지 모른다. 그런 어둠 속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짜릿하다고 하기엔 손사래가 쳐지고, 용기를 내세우기엔 옹색하다.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또 해야 하는 윤회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떻게 수십 년 동안 이런 곳에서 사는지 반문하곤 했다. 대문은커녕 울타리 조차 없는 초라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자물쇠 하나 없는 창호지 바른 문이 줄지어 있는 세 칸짜리 집. 방 안에는 아직도 서까래의 흔적과 그 아래로 메주나 나물류가 매달려 있다. 가끔은 정겹고, 가끔은 궁상맞으며, 가끔은 짠하다. 고작 일 년에 몇 번 경험한다는 핑계로 낯설다 내지는 익숙하지 않다고 내뱉는다. 어쩌면 영원히 그런 상태로 남고 싶은 이기심인지 모른다. 나는 서울 며느리이고 그녀는 시골 시어머니로 구분 짓는 것으로, 평행선과 간극을 내심 허용한다. 그 속에는 서울과 시골 같은 흔한 이분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란 각기 다른 종착점으로 분기될 뿐이다. 하나 되고 싶지만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틈을 가진 채로.
나는 시골의 밤이, 어두운 자연이 던지는 두려움을 감지한다. 더 이상 그것이 낭만이 아님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런 곳에서 한평생을 사신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는 손톱만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에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을 것이다.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싫다 좋다 내색하지 못하고 수긍했던 것처럼. 그녀라고 쾌적한 화장실을 만들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버티고 아물고 단단해진 인간의 두려움은 초연하고 무뎌진 갑옷으로 스스로 채워지는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세끼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 지난 고생과 한을 지겹도록 되새기는 어머니. 그럼에도 감정 내색 없이 강인한 무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어머니. 하루 종일 편히 쉴 자리를 기다렸건만 막상 밤새 뒤척이는 어머니. 그녀는 시골의 야심한 자연과 무척 닮았다. 나는 그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닮을 수 없다. 나는 시골에서 살 수 없고, 감정을 삭히며 초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할 수 없다. 서울을 닮은 나는 인간적인 혹은 인간과 함께하는 자연을 사랑한다. 그렇게 자란 나는 좀 더 이상적인 욕심을 낸다. 인간과 자연이 어깨를 나란히 할 그 날을. 그러나, 압도된 자연 앞에서 그것이 얼마나 미련스러운 것인지 깨닫는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부정이나 융합이 아니라 그 상태로의 인정이다. 사투리가 심해 가끔 소통도 힘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민함과 반듯함 때문에 함께 있는 며칠 동안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그녀에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쓰럽거나 연민할 자격이 없다. 잘잘못이란 판단조차 내릴 수 없다. 단지 그렇게 극복했다는 이유로 두려움 내지는 경외심을 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방식을,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와 나의 거리감은 어쩔 수 없다.
시골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어머니는 무심하고 초연하게 한결같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야속한 건, 자연은 그대로인데 어머니만 그런 무수한 하루를 버티다가 고목처럼 늙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선뜻 손조차 잡지 못하는 서울 며느리의 인간미는 얄궂다. 내가 하는 변명이란 고작 지켜본다는 것. 앞으로 수십 년을 마주칠 밤과 어머니가 더 이상 좁혀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를 건너가는 중이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그런 상념으로 잠 못 이루고 밤새 뒤척이는 어머니의 누운 자리를 어렴풋이 바라볼 뿐이다.
제가 느낀 시골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로망인데요. 이를테면, 처음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뉘엿뉘엿 넘어가는 일몰 사이로 삼삼오오 모인 집들이 내뿜는 아지랑이 같은 연기. 소박하지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한 밥상. 농사를 돕느라 시골 아저씨 같은 몰골로 나타난 남편에게 등목을 해줬던 일. 시골 생활은 촌스러운 낭만이 이벤트처럼 펼쳐집니다. 반면, 해가 지날수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함도 생기죠. 두 번째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었습니다. 밤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삶. 세끼를 챙기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어 초저녁부터 이불을 깔고, 개인의 공간 따윈 허용되지 않는 공동체적 생활이었어요. 저처럼 밤잠이 없고 이것저것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문뜩 어두운 밤과 마주하게 된 것이죠. 서울에선 상상할 수 없는 고즈넉하고 무방비 상태에 놓입니다. 그들은 자연을 완전히 믿고 맡깁니다. 그리고, 동화됩니다. 그것이 아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시골생활이자, 어머니의 삶이었던 것 같아요. 이번 방문에서 유난히 잠들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것을 조금씩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시골의 야심한 밤 한 귀퉁이에 접속된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