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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y 28. 2017

넘어와

                                                                                        표지 : 산책(마르크 샤갈, 1917~19)



려오는 길에 궁궐이 있다. 대문은 빼꼼히 열려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을 서성인다. 들어가 볼까? 가로등 사이로 어둠이 제법 내려앉았다. 고색창연하던 웅장함을 집어삼켜 을씨년스럽다. 오싹해진다. 야심한 밤에 오랜만에 만나 이렇게 걷고 있는 것도 참. 나가자. 갑자기 손을 잡자고 한다. 머쓱하다. 잡아야 하나, 잡아도 될까? 비가 내린다. 습식의 안개탕에서 분사한 듯 흩날리는 미적지근하고 끈끈한 물줄기. 우산도 없는데. 저쪽으로 피하자. 어느 상점의 간판 아래 좁은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정류장은 저만큼인데, 뛰어가면 젖지 않고 닿을 텐데. 숨을 고르는 사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정적. 가까워진 거리, 어색한 분위기, 딱히 할 말도 없고. 다가올 것 같은 아니 다가오는 숨소리. 내가 싫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넘어올까, 넘어갈까. 



람과 사람 사이 감정을 주고받는 시간. 어느새 이어진 미묘한 화학작용과 달라진 공기. 그 흐름을 타고 이어진 찰나. 설렘은 해 볼까에서 뭐 지로. 의혹은 해도 될까에서 혹시로. 두려움은 괜찮을까에서 왜 이래로. 망설임은 넘어올까에서 어떡하나로. 애정인지 뭔지 알쏭달쏭한 기분에서 사랑이 되기까지의 감정을 배회하고 공회전한다. 사랑 이후의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인과관계와 달리, 그 순간은 어떤 결론도 없다. 단지 심장이 쫄깃쫄깃해진 아드레날린의 상태다. 그 가볍고 경쾌한 흥분은 우리 주위의 세상을 여러 빛깔로 채색하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갑자기 사랑의 요정이 나타나 온 세상에 꽃가루를 뿌린 것 같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용감한 왕자의 키스로 깨웠던 핑크 빛 분위기. 서툴렀지만 로맨틱했고 강렬하지 않아도 찌릿한 감촉. 그렇게 넘어와는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어와는 설렘이자 찰나의 감흥이다. 유혹에 휘말리는 미묘한 심리와 신의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용돌이 속에 있다. 묘미는 줄다리기처럼 밀고 당기는 기술이다. 오랜 사이든 즉석 만남이든 멋쩍고 어색한 흐름을 바꿔버리는 계기가 필요하다. 어? 에서 어!로. 둘 중 하나가 내민 용기를 애써 외면하지 말 것. 천재지변 같은 뜻밖의 휩쓸림에 서핑을 해볼 것. 그 순간을 놓쳤다면 평생 후회할지 몰라요! 그 중력의 힘을 만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으며 더더군다나 거스르는 것조차 꽤 피곤한 일이다. 당기거나 끌리는 대로 몸을 맡기게 된다. 이심에서 전심으로 슬그머니 전파되어야 한다. 그런 이미지는 ‘샤갈’의 <산책>에도 등장한다. 이렇게 손을 뻗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의 손이 닿을 때까지. 하늘을 날아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어요. 



포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찰나의 여흥. 완전함과 일치의 순간이다. 그것을 넘자 다음은 일사천리다. 어떤 분기점이 되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하나로 꽁꽁 묶어버린 채 싱그러운 연애의 정원 속에 던져진다. 놀이동산에 끝없이 펼쳐진 노란 길을 따라 감미로운 분위기를 뒤쫓는다. 주렁주렁 열린 솜사탕 같은 설렘을 한 조각도 흘리지 않고 먹어 치운다. 헛헛했던 빈자리를 서로의 반쪽으로 채우는 사이, 추억의 보따리가 조금씩 커진다. 둥실둥실 떠오를 때면 잠시 멈춰서 바라본다. 가끔씩 우스갯소리처럼 주고받는다. 싫다고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에이, 그럴 리가. 그렇다면, 그 시간에 왜 궁궐로 들어가자고 했지?



 달달함은 그날의 풋풋한 향내를 몰고 와 취기가 오르듯 환기된다. 함께라는 일상의 안녕을 이끈 장본인인 동시에, 가끔씩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닐 흥분을 부추긴다. 그 설렘의 감정 속으로 다시 한번, 어때? 그러나, 그 시절의 넘어와는 잡힐 듯 보여도 손에 잡히지 않는 희열이다. 안정이라는 이름은 어떤 이상적인 감정까지 포용하지 못한다. 휴대폰 좀 그만 보고 나 좀 봐. 씻고 올 때까지 자지 말고 있어. 요즘의 넘어와는 생각만큼 감미롭지 않다. 둘 중 하나는 피곤에 절었고, 아이들은 떨어지지 않는다. 설레기엔 삶의 의무감이 점점 늘어간다. 오히려 넘어와를 놓지 못하는 헛된 바람이 가장무도회 같은 욕망으로 전이될 뿐이다. 즐거움과 허무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존재한다. 무색이라도 좋고, 잠깐이라도 좋다. 가끔씩 낯선 호기심에 사로잡힐 수 있다면, 나를 둥실 구름 속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또 다른 너의 모습을 만나고 싶어. 그렇게 떠다니다가 언제 다시 무거워진 몸으로 땅에 곤두박질할지 모르지만.  



리가 바라는 건 그때처럼 로맨틱한 순간을 느끼는 것. 가끔 그럴 수 있음에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 이 작은 행복은 바람으로 끝날 때가 대부분이다. 집안일에 치여 휘발되어 사라지거나 문뜩 기억 저편에서 두리번거리는 회상의 유희임을 애써 납득해야 한다. 그래도 추억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되뇔까? 그렇지만, 앙금은 눈처럼 쌓인다. 아무리 청소해도 금세 과자 부스러기가 나뒹구는 집안처럼. 치워도 계속 쌓이는 먼지 마냥. 추억은 무슨, 안락은 개뿔. 울컥하는 마음에 터져 나오는 변덕스러운 잔소리가 공기를 가로지른다. 눈치를 보며 슬쩍 피하는 그와 아이들. 들쩍지근했던 연기가 현실의 무취 속에 묻히는 것을 관망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감정의 한편에 밀어버리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다간 화석이 될지 모른다. 너무 오래 방치한 탓에 떫고 텁텁한 녹차를 들이켜는 기분이다. 행복은 생각보다 완전하지 않다. 



너와 나 사이 결론은 없는데.
널 보면 이렇게 전부 알 것 같은 게.
나도 힘들어 날 도와줘. 

                                                                                      - 곡 <넘어와(2017)> 中, DEAN (Feat. 백예린)






어느 날, 듣게 된 ‘DEAN’의 <넘어와>. 누구나 그런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한두 번씩 경험했겠죠.
살랑거리는 바람과 싱그러운 봄기운이 다가올수록, 그때쯤 시작됐던 그날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음악이 흐르고 샤갈의 그림으로 환기되네요. 지금과 많이 달랐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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