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 작은 테이블을 펼치고 그 위로 노트북을 켠다. 원두를 꺼내 어떤 의식(儀式)처럼 경건하게 갈아본다. 일인용 드립 머신에 울퉁불퉁 갈린 그것과 생수를 담은 후 스위치를 켠다. 치지직 뿌웅, 나지막한 신호음이 퍼지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뜨거워진 물이 원두를 적신다. 쭈르륵 흘러내리면서 구수하고 진한 향기가 퍼진다. 심리적 안정과 위안을 선사하는 선물 같은 순간.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노트북에서 음악파일을 찾는다. 그것이 오기 전까지 완벽한 준비를 해놓고 싶다. 완성을 알리는 수증기 소리에 황급히 머그잔을 꺼낸다. 익숙한 선율 속에서 한 모금을 들이켠다. 나이스 타이밍! 첫 목 넘김이 제일 감미롭고 강렬하다. 그것이 커피의 자기장으로 이끄는지 모른다.
글을 쓸 때 마시는 커피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블랙이다. 드립머신에서 추출하거나, 카페에서 공수한 뜨거운 아메리카노다. 아무래도 얼음을 품은 대가로 고유의 맛을 내준 차가운 커피는 감흥이 없다. 열기에서 풍기는 본연의 냄새가 좋다. 향기가 퍼지면 내 몸과 주변의 분위기까지 포근하게 품어준다. 내 마음은 이미 마법의 융단을 타고 저 멀리 이국적인 곳으로 향한다. 중남미의 작고 아기자기한 재즈 바에 앉아 있거나 고요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고즈넉한 전망대를 거닌다. 따뜻한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감미로운 기운을 북돋는다. 낯선 환상과 과거의 추억 속으로 소용돌이친다. 그러다가, 뜨거운 물줄기가 발끝까지 내려가면 온몸이 노곤 노곤해진다. 잠시 멍한 상태가 되거나, 기가 빠져나가듯 간질간질하기도 하다. 연거푸 마신 몇 모금에 마치 온탕에 들어가서 밀린 때를 불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잡념과 집착, 무언가를 캐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사유와 영감을 끄집어내듯. 커피와 함께 침착해지는 감성. 이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자판에 손을 올려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쓰고 싶었지만 막상 자리를 잡으면 쓸 수 없었던, 혹은 머리 속에 맴도는 무언가를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을 밀어버린다. 불려놓은 생각을 모으고 짜깁기하며 최대한 이어 붙인다. 말이 되든 안되든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식어버리는 것보다 어떻게든 뽑아내는 게 중요해. 따뜻한 커피는 내 자신과 소통하는 법을 일러주는 것 같다. 천천히 더듬어도 좋고 여유 있게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재촉하는 일상과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나침반이다.
가끔씩 가족과 함께 마시는 커피도 좋다. 프랜차이즈에 들르기도 하지만, 선호하는 카페는 따로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곳. 직접 원두를 볶고 내려주는 곳. 그중 한 군데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에 사람들이 남겨놓은 쪽지가 가득하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커피를 사랑하는 이가 참 많음을 알 수 있다. 숨겨진 곳까지 찾아온 이들이라면 멋보다 맛을 중시하지 않을까? 핸드 드립으로 마시려면 원두를 선택해야 한다. 여러 개를 적절히 섞은 블랜드보다 싱글을 고수하는 편이다. 그래야 산지에 있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브라질’ 산은 화려하고 강렬한 따뜻함을, ‘케냐’ 산은 묵직한 진한 흙내음을 풍긴다. 그곳의 산과 들의 풍경이 그려지고 흐드러진 커피 농장이 보이는 듯하다. 그들의 피와 땀이 나에게로 와서 커피 한잔의 행복을 선사하니 눈물 나게 고마울 지경이다. 긴 향기를 꼬리처럼 달고 내 앞에 놓인 대접처럼 넉넉한 커피잔. 먼저 코에 대보고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어 입안에 가득 담아본다. 고소한 견과류와 달짝지근한 과일향 뒤로 시큼함이 살짝 찌르고 씁쓸함으로 한방 날리며 사라지는 풍미에 살짝 찌릿한 현기증이 인다.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입매가 살짝 올라간다. 한번 더! 어라, 이번에는 구수한 숭늉과 씁쓸한 와인향이 교차된다. 희극배우 같은 만감 속의 나를 보더니 그가 궁금해한다. 먹어보라고 건넸는데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쓰다는 반응. 커피는 달달해야 제 맛이라고 한 마디 덧붙이면서. 커피 한잔과 달달한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의 운명적인 만남을 당최 모른다. 전자는 후자의 달달함을 잠시 품었다가 질릴 때쯤 서서히 헹궈준다. 그 단쓴단쓴의 조합은 사랑놀음 같다. 달콤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한 주의 피곤과 짜증을 나누기도 한다. 괜히 다투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한잔은 그 마저 다독인다. 이 또한 언젠가 추억의 이름으로 되새기겠지.
노곤한 오후엔 달달하거나 부드러운 커피가 그리워진다. 그럴 때마다 찾는 건 스팀 우유와 에스프레소가 섞인 카페라테. 요즘처럼 더운 날씨엔 아이스가 제격이다. 주문하는 동안 온통 그들의 매끈한 조합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우유맛부터 들어오다니. 차가운 우유에 에스프레소를 붇고 젓지 않고 내놓을 때마다 여간 낭패가 아니다. 차라리 커피 우유를 마시는 게 낫지. 얼마 전 본 기사에선 흰 우유 소비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그게 들어간 커피가 급성장하면서 소비 행태가 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긴, 카페라테를 주문하면서 우유 반 컵도 마시는 거라 위안했으니까. 여기에 영양까지 생각하는 건 어쩐지 모순 같다. 분위기로, 기호로, 풍미로 마시는 게 아니었던가? 마시는 횟수가 괜히 늘어난 게 아니다. 글을 쓴답시고, 지인과 원활한 대화를 위한다며, 울적하고 심란할 때 또 한잔. 속 쓰림이 느껴지는 횟수가 늘었다. 뭐를 탄다고 능사가 아닐 것이다. 하루에 한두 잔 정도로 줄이는 게 낫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영혼의 단짝을 과용해선 안될 테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커피를 도저히 떨칠 수 없을 때가 있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온몸이 솜에 젖은 듯 푹 절었을 때, 그것만이 나를 일으켜줄 것 같다. 그에게 또 한잔 부탁한다. ‘에휴~’하는 표정으로 내민 컵 속에 걱정 반 애정 반이 담겼다. 고마워. 멍하니 홀짝거린다. 서서히 돌아오는 정신으로 삶의 도돌이표를 확인한다. 아, 오늘도 무사히 마쳤구나. 계획한 대로 잘 끝냈구나. 열심히 살았네. 이것은 일종의 보상. 고로,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 만족한다. 그런 하루. 그런 나날들. 자족할수록 마음은 낙천적이 된다. 어떤 자신감도 차오른다. 딱 그때 커피가 격려한다. 토닥토닥.
언젠가 여동생이 말했습니다. “언니가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어.”
아, 언제부터 찾게 됐지? 진심으로 즐기게 된 시기는 불과 몇 년 전입니다.
그 전엔 어떤 목적으로 마셨었지만, 이제는 함께하는 시간을 고대합니다.
커피도 타이밍이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