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지던트라 불리는 시계
"붕괴" : 무너지고 깨어짐.
* 본 리뷰에는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헤어질 결심에선 깨어진 롤렉스 데이데이트가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몇 차례나 등장한다. 이거 롤렉스 PPL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컷에 의미를 두는 박찬욱 감독의 성향을 보아서도, 매장 출입조차 힘든 롤렉스의 위상을 보았을 때도 PPL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롤렉스이며 왜? 데이데이트일까 그 이유를 한번 짐작해보자.
여주인공 서래(탕웨이)의 남편인 기도수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다.
외국인의 입국 허가를 해줄 것인지 결정하고 도장을 찍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타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다.
서래는 중국인이다. 밀입국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시 밀입국자 전원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본인은 달랐기에 입국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독립투사였기에 그랬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가 욕심나서,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던 기도수의 욕망이 서래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도수는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품위 있는 삶을 위해 트로피 와이프가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나이로 보아 공무원 직급도 높을 것이다. 그는 고급 등산의류를 걸치고 암벽등반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기도수TV라는 유튜브 채널에 자뻑에 가득 찬 영상을 올리곤 한다.
집에선 방문을 닫고 들어가 아마도 영국산 고급 오디오 가라드로 추정되는(아닐지라도 고급임에는 분명한) 턴테이블로 말러의 교향곡을 품위 있게 즐긴다. 그가 실상 품위 있는 인간은 아니었을지라도 품위를 추구하는 인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자신의 물건에는 이니셜을 새긴다. 살아있는 그의 아내의 몸에도 새긴 것으로 보아 그는 아내를 자신의 중요한 물건 중 하나로 여기는 듯하다.
그런 그가 롤렉스 데이데이트를 찬다. 왜 그런 설정을 했을까?
제작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시계를 선택했을 것이다.
첫 번째, 캐릭터 측면에서 보자면 기도수는 취미로 암벽등반을 하고 정상에서 말러를 즐기는 고고한 취미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강하고 멋진 것만 하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품위에 어울리는 최고의 시계를 사고자 한다면 어떤 시계를 고를까?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파텍필립과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엔트리 드레스워치도 좋은 선택이었겠지만 그건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패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아무리 그래도 공무원으로서 뇌물에 닳고 닳은 캐릭터가 아니라면 거의 1년 치 봉급을 모아서 샀을 터인데 옷깃만 스쳐도 기스가 나는 시계(데이데이트는 스틸이 아닌 골드이기 때문에 기스에 취약하다.)를 차고 암벽등반을 한다고?? 이 부분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든 설정이다. (혹시.. 짭을 차는 캐릭터?..)
두 번째, 스토리 측면에서 보자면 Day-date 시계의 상부엔 Day(요일)가 큼지막하게 표시되기 때문이고 이 영화에서 요일은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요일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기엔 최적의 시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생긴 것만 보고 제작진이 이 시계를 선택했다면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계는 존재감이 너무 강력해서 등장하는 순간 캐릭터에 강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디테일에 능한 박찬욱 감독님이 시계엔 관심이 없어서 이 부분을 간과한 걸까? (실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계를 소품으로 선택할 때 큰 실수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토픽에 대해선 따로 포스팅을 하려고 한다.)
여기서 잠깐. 롤렉스 데이데이트에 대해서 알아보자.
데이데이트의 별칭은 프레지던트다. 왕관이 심벌인 롤렉스 중에서도 최고의 시계라는 얘기다. 리테일 가격이 무려 5천만 원에 달하고 소재도 스틸은 섞여있지 않다. 올 금 아니면 플래티넘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시계는 리테일 천만 원대의 롤렉스 Datejust이다. 나쁜 놈들이 즐겨 차는 시계이기도 하다. 마스터에서 진회장(이병헌)이 착용했고, 범죄와의 전쟁에서 건달이고 반달이고 할 것 없이 차고 나온 시계이기도 하다.
데이저스트라고 잘못된 발음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데젓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롤렉스의 상징과도 같은 시계이기에 대다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부의 상징으로 차용하는 시계가 바로 Datejust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암벽등반을 하다 죽은 기도수와 더불어 두 번째 남편(박용우) 역시 같은 시계를 착용하고 있다. 이쯤 되면 서래(탕웨이)는 데이데이트 매니아인가?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두 남자의 공통점은 데이데이트 밖에는 없는 듯하니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위해 같은 시계를 소품으로 사용한 듯한데 그 외에도 이유가 있다면 참으로 궁금하다.
사실 기도수가 명품을 좋아하는 캐릭터라면 관용적 측면에서도 데잇저스트를 찼어야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금통 롤렉스를 착용하고 익스트림 스포츠를 한다면 순간적으로 캐릭터에 대해서 '뇌물 받는 공무원인가?' 아니면 '알고 보면 금수저이기에 저 아름다운 탕웨이(서래)가 아버지 뻘되는 사람과 결혼을 한 걸까?' 등등의 쓸데없는 추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수가 롤렉스 데이데이트를 차고 암벽 등반하다 죽은 것은 오버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다음 대사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당신은 품위가 있어요. 현대인 중에요..
서래의 이 대사.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다.
남자 중에.. 경찰 중에..라고 말했으면 식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 중에.. 라니.
현대인은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호모 이코노미쿠스?
경제가, 돈이 모든 분야의 최상위에 자리 잡은 이 시대에 현대인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쫓고 산다.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직업이 주식 애널리스트고 온라인 주식 사기를 통해 많은 돈을 굴린다는 설정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소비의 아이콘인 롤렉스, 그중 그들조차도 품격 있는 시계의 상징으로 대놓고 홍보하는 데이데이트야 말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뜬구름 같은 허상을 상징하기엔 적격이 아니었을까?
데이데이트를 차고 품위 있는 고급 취미 생활을 즐기지만 아내를 폭행하는 야비한 캐릭터 첫 번째 남편. 한술 더 떠서 최고급 시계와 집, 차까지 굴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지만 남들의 피눈물 나는 돈을 사기 쳐서 생활하는 두 번째 남편. 서래는 왜 이런 남자들만 만나서 결혼한 것인지.. 아마도 품위 있는 남자 해준과 대비시키기 위해 그렇게 설정했겠지.
해준과 서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이 깨어진 롤렉스 데이데이트 만큼이나 애절해서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영화 '헤어질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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