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 스피릿과 브랜드 헤리티지의 불협화음
올여름 개봉한 영화 ‘F1 더 무비’는 실존 F1 서킷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팀 APXGP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가상의 팀에는 한 럭셔리 시계 브랜드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IWC 샤프하우젠이다. 차량, 유니폼, 헬멧, 피트박스, 심지어 등장인물의 손목까지 끊임없이 IWC 로고가 노출된다. 하지만 F1 팬들과 시계 마니아들은 같은 의문을 품는다. "왜 하필 IWC일까?"
시간을 달리는 스포츠. 레이싱과 시계 브랜드의 특별한 관계
0.001초. 단 한순간의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스포츠가 바로 레이싱이다. 이처럼 정밀한 시간 측정이 핵심인 스포츠는 드물다. 레이싱이 ‘시간의 스포츠’로 불리는 이유다. 레이싱은 시계 브랜드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단순한 홍보 수단을 넘어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있어 최적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시계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본다면 어떨까? 드레스워치와 스포츠워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스포츠 워치를 기능성이 돋보이는 내구성이 강한 시계라고 정의한다면 그 용도에 따라 다이버 워치, 레이싱 워치, 파일럿 워치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겠다. 이 같은 구분은 단지 기능적인 차이에 그치지 않고, 시계가 지닌 역사적 기원과 상징성을 반영한다.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육·해·공’으로 불리는 이 세 장르를 모두 소장하는 것이 일종의 로망으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다이버 워치는 시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높은 방수 성능과 내구성으로 인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많은 브랜드들이 자사의 대표 모델로 다이버 워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리하여 롤렉스 서브마리너, 오메가 씨마스터, 태그호이어 아쿠아레이서, 그리고 세이코의 다양한 다이버 워치 시리즈는 오랜 시간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워너비' 혹은 '필수템'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항공 시계의 기능적 특성은 무얼까? 높은 고도와 수많은 전자 장비로 인한 자기의 영향은 기계식 시계의 오차에 악영향을 주기에 항자성이 가장 중요한 성능이 될 것이고, 비행에 집중하면서도 쉽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인성 또한 중요할 것이다.
항공 시계로 유명한 브랜드로는 비행 마니아인 배우 존 트라볼타를 모델로 내세웠던, 그리고 파일럿이 주인공인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도 협찬하였던 브라이틀링이 먼저 떠오른다.(마케팅의 힘이다.)
하지만 마니아들은 브라이틀링보다 IWC의 마크 시리즈를 더 먼저 떠올릴 것이다. Mark 시리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 시계로 개발된 이후 영국 공군(R.A.F)에 납품하게 되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Mark9에서 Mark20까지 쉼 없이 발전) 인기를 얻고 있는 제품이다. IWC에도 포르투기저 등 다양한 라인이 있지만 Mark 시리즈만큼 오랜 세월 헤리티지를 유지하고 있는 라인은 없기에 IWC의 주력은 파일럿 워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지막으로 레이싱 워치의 기능을 살펴보자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크로노그래프 기능(스톱워치)이 중요하다. 그리고 속도 측정을 위한 타키미터 베젤 정도가 추가될 수 있겠다.
레이싱 워치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모델은 단연 롤렉스의 데이토나다. 이 시계는 단순한 인기를 넘어, 중고 시계 시장에서 '시테크(시계+재테크)'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정도로 엄청난 위상을 갖고 있다. ‘데이토나’라는 명칭은 미국의 대표적인 내구 레이스인 데이토나 24시(24 Hours of Daytona)에서 유래했다. 본 영화 속에서도 초반 브래드 피트가 데이토나 레이스에 출전하는 반가운 장면이 나온다.
또 다른 대표적인 레이싱 워치로는 태그호이어의 모나코와 몬자가 있다. 이들 모델 역시 명칭에서부터 레이싱과의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모나코와 이탈리아 몬자는 F1을 대표하는 경기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F1의 역사에서 두 브랜드는 빼놓을 수가 없다. 역대 F1 공식 타임키퍼 자리는 태그호이어와 롤렉스가 양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데이토나와 모나코는 각각 레이싱을 사랑했던 전설적인 배우와 연관되어 더욱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롤렉스 데이토나는 실제 레이서이자 배우였던 폴 뉴먼이 즐겨 착용하면서 그의 이름을 딴 '폴 뉴먼 데이토나'라는 별칭까지도 생겼고(몇 년 전 시계 경매 사상 최고가에 거래), 태그호이어 모나코는 스티브 맥퀸이 영화 '르망(Le Mans)'에서 직접 착용하며 전설적인 시계로 자리 잡았다.
스티브 맥퀸이 영화 속에서 모나코 시계를 착용한 모습은 수십 년간 마니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해왔다. 그래서 ‘F1 더 무비’에서는 과연 어떤 시계가 등장할지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눈에 띈 브랜드는 바로 IWC였다. 레이싱카 곳곳에 크게 붙은 로고와 출연자들의 손목에 착용된 시계 모두 IWC였다. 물론 IWC도 F1 레이싱팀인 'Mercedes-AMG PETRONAS Formula One Team'의 공식 엔지니어링 파트너로 활동하며 관련 스페셜 에디션 시계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 이유는 아마도 브랜드 정체성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IWC는 파일럿 워치가 주력이다. 주인공 조슈아가 차고 있는 시계는 IWC에서 영화를 위해 만든 새로운 모델 '파일럿 워치 퍼포먼스 크로노그래프 41'이다.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 시계의 디자인은 Mark16 이후로 유지하고 있는 독일 B-Uhr 스타일의 파일럿 워치가 원형이다. 파일럿 워치에 크로노그래프를 넣고 롤렉스 데이토나를 의식한 듯 타키미터 베젤까지 넣은 디자인이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새로운 레이싱 워치를 제작했다면 어땠을까? 현재 IWC 정도의 위상이라면 새로운 모델 개발에 투자를 해도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 제작을 위해 새로운 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은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IWC가 F1팀 파트너로 활동한 세월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려먹기 식으로 파일럿 워치 디자인에 이것저것 갖다 붙여서 레이싱 워치로 판매하려는 발상은 참으로 별로였다.
IWC보다는 최근 F1 공식 타임키퍼로 돌아온 태그호이어가 협찬사로 참여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 이유는 각 브랜드 헤리티지에 따른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브래드피트 손목에 태그호이어 모나코 구형 모델이 올라가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을까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스티브 맥퀸에 대한 오마쥬로서의 의미도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영화 속 브래드 피트는 IWC 구형 인제니어를 차고 있다. 인제니어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엔지니어를 위한 항자성 기능이 돋보이는 튼튼한 시계다. 오히려 정비팀에서 차고 있었어야 할 시계였다.)
F1 팬들 사이에서도 “왜 태그호이어가 아니라 IWC?”라는 반응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영화 개봉과 함께 태그호이어에서 '모나코 F1 더 무비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했다면 시계팬들 입장에서도 꽤나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론 : 시계 마니아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지만, 만듦새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영화였다. 연출, 촬영도 대단했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 디자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