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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님 손잡고 떠나자. 오사카로!

1일 차 : 신의 한수였던 우메다 숙소

by 토이비

드디어 오사카로 떠나는 날.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온 아내는 쿨하게 우리를 배웅하였다. 역시 쿨하게 엄마와 작별하는 따님의 머릿속에는 유니버설과 해리포터 밖에 없는 듯 보였다. 무언가를 저토록 절실하게 원하고 기대하고 흥분했던 적이 언제였더라라는 생각에 왠지 아이가 부러웠다.


공항에 일찍 도착하여 수하물을 부치고 와이파이 도시락을 수령하러 갔다. 요즘은 보통 로밍대신 eSIM을 사용하는데 아이의 폰에서 eSIM이 작동 안 하면 어떡하나라는 우려 속에서 도시락 와이파이를 사용하기로 했다. 사람 많은 유니버설에서 혹시라도 아이와 떨어지더라도 연락은 되어야 하니 말이다.

출국 수속하는 과정을 야무지게 따라 하는 아이를 보니 왠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벌써 저렇게 컸구나라는 마음에 대견하기도 하고 좀 섭섭하기도 한 그런 복잡한 심경이었다.


제2터미널 출국장 안엔 식당이 부실하고 사람도 많다. 매번 밖에서 먹고 들어 올걸.. 이란 뒤늦은 후회를 한다. 입맛 까다로운 따님은 처음부터 까탈을 부려 아빠를 괴롭혀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물도 가져오고 식판도 들고 오는 등 부지런히 아빠를 돕기 시작했다. 그닥 맛이 없는 식사도 연신 맛이 괜찮다고 하며 아빠의 흥을 돋우는 노련함까지 보여줬다. 기특했다.

비행기에 타면 창가는 늘 아이의 몫이다. 창 밖 풍경 사진도 찍고 다운받아 온 흑백요리사를 한편 정도 함께 보고 나니 어느덧 착륙할 때가 되었다. 착륙할 때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일 것이다.

간사이 공항 입국심사는 생각 외로 빨리 진행되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ATM 기에서 환전해 둔 돈을 인출하고 예약해 둔 리무진을 타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출발하기 바로 전인 만석의 리무진 버스를 급하게 탔더니 아이와 앞뒤로 떨어져 앉게 된 것이다. 앞은 일본 아저씨, 뒤는 러시아 아저씨. 눈치를 보니 둘 다 바꿔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둘 다 못 본 척 창밖만 내다보고 있기에 아이를 달래 일본 아저씨 옆에 앉히고 나는 러시아 아저씨 옆에 앉기로 했다.

러시아 아저씨는 내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오사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난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고 하며 대충 넘어가려는데 앞에 앉은 일본 아저씨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영어회화에 심하게 굶주렸는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며 러시아 아저씨에게 신나게 안내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 틈을 놓칠 수 없었다. 내 딸이 어려서 옆자리에 앉고 싶은데 자리를 바꿔줄 수 있냐고 물으니 10여 초동안 고민을 하더니 자신의 권리보다는 러시아 아저씨와의 대화가 고팠는지 자리를 바꿔주었다. 다행이었다. 우메다 역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동안 고함소리에 가까운 두 사람의 대화소리를 들으며 가야 했지만 딸과 옆자리에 앉아 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유튜브로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하고 온 아이는 일본 사람은 다 조용하고 공공장소에서 떠들면 노려본다고 알고 있었지만 복식호흡의 우렁찬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수다쟁이 일본 아저씨 덕분에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좋은 학습을 할 수 있었다. 이론은 이론일 뿐 역시 실전 학습이 최고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터라 리무진 버스를 타고 우메다 역으로 가는 길은 점차 막히기 시작했다. 아이는 가끔씩 언제 도착하냐며 보채기도 했지만 역시나 아빠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절제했다. 많이 컸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IMG_4707.heic 한큐 레스파이어 호텔 32층에서 내려다본 풍경
호텔 뒤편의 모습. 많은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파란 간판의 GU 매장이 보인다.

우메다 역에 위치한 한큐 레스파이어 호텔은 환상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서 5분 이내 거리였다. 아이는 호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흥분해서 자신의 계획을 프레젠테이션 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호텔 주변에서 먹고 주변에 뭐가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자고 하였다. 뭔가 속내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역시.. 어디서 검색을 했는지 일본에 가면 GU에서 잠옷을 사야 한다는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호텔 주변엔 많은 GU가 있었다.


IMG_4643.heic 정면에 보이는 건물 우측으로 이치란 라멘집이 있다.


짐을 풀고 나와 호텔 반대편으로 걷다 보니 이치란 라멘이 보였다. 예전에 오키나와에서 갔을 땐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사카에서 특별히 인기가 많은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보였다. 아이는 역시나 유튜브에서 봤는지 이치란 라멘을 꼭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여정으로 힘들고 배도 고팠던 나는 사람이 없어 보이는 식당이 맛있어 보인다며 라멘 집 바로 위에 위치한 피자 파스타 가게로 유인했다. 평소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라 메뉴 선택까지는 좋았는데 입구에 들어서니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 명도 없었다. 돌아서기엔 너무 피곤했던 아빠는 여기 맛있어 보인다고 바람을 잡으며 자리를 잡았다. 아이에게 늘 일본은 어디 가도 음식이 맛있다고 얘기해 왔던 터라 맛없는 음식이 나올까 봐 초조했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가장 맛있어 보이는 파스타와 피자를 주문했다. 다행히도 음식 맛은 괜찮았고 아이는 ‘진짜 맛있다’며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였다.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아빠의 기분을 맞춰주고 GU에 가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포석이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아빠에겐 허기를 채우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IMG_4678.heic 헵파이브 대관람차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우리는 계획대로 근처에 있는 헵파이브 대관람차를 타기 위해 걸어갔다. 빨간색 예쁜 대관람차를 타며 아이는 매우 즐거워했다. 비 내리는 오사카의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목표 지향형인 따님은 목표를 이루기 전까진 끊임없이 사람을 괴롭힌다. 조금이라도 빨리 GU에 가서 잠옷을 사야만 아빠의 마음도 편해질 터였다. 그리하여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점찍어둔 GU로 들어가려는데 아쉽게도 영업시간이 끝나 입장할 수가 없었다. 딸은 일본 상점들은 왜 이렇게 마감이 빠르냐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보통 8시면 문을 닫는다고 달래며 호텔로 발길을 돌리는데 마침 근처에 서점이 보였다. 딸이 문구 덕후이기 때문에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호기롭게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본 문구점에 가면 네가 좋아하는 것이 산처럼 쌓여있을 거라고 희망을 줬던 것에 비해 삭막하기 그지없는, 참고서 등을 전문적으로 파는 서점이었다. 식당도, 문구점도.. 아이에게 희망을 줬던 것에 비해 언행일치가 하나도 안 되는 거 같아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의 눈을 가진 따님은 그 와중에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아이의 말에 의하면), 책을 고정시키는 실용적인 클립을 발견하였고 나는 깔끔한 마무리를 위하여 아이의 안목을 과하게 칭찬하면서 클립을 사주었다.


이렇게 첫날의 여정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여행의 꽃, 숙소로 돌아왔다.

IMG_4635.heic 한큐 레스파이어 호텔 트윈룸. 침대가 매우 편했다.
IMG_4703.heic 돌아오는 길에 예뻐서 산 푸딩. 비주얼에 비해선 맛이 별로였다.


사랑하는 따님과 푸딩을 나눠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맛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몸은 왜 이리 피곤한 걸까. 이것은 휴식을 위한 여행인가 미션 수행을 위한 고행인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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