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아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나이가 들면서 의식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도 모르게 주변 환경에 의해 학습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인은 딸아이에게 여자니까 핑크색 물건이나 인형을 사줘야지 하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구태의연한 성에 대한 특성(?)을 습득하고 오는 것에 놀라울 때가 있다고 했다. 이렇듯 모두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의심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것들이 있지 않을까? 나에게 그런 것들 중 하나는 ‘인생의 시간표’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땐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고 대학을 나와 적당한 곳에 취직한 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사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게 ‘당연한 것’ 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해 본 적도 없었고. 이런 생각에 서서히 균열이 생긴 계기는 유학이었던 것 같다. 이미 휴학으로 동기들보다 일 년 늦은 대학 생활을 하고, 졸업 후 대학원에 가면서 내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어떤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생활로 그들과의 시간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직 후 신입사원 연수를 거치면서 내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인생의 시간표가 더 이상 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생각했던 ‘인생의 시간표’에서 매우 크게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산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때는 불안했던 적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다른 사람들의 논리에 팔랑대는 나의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 이 나이에 OO 정도의 자산은 있어야지.’라든가 ‘결혼은 해야지, 나중에 늙으면 분명 후회할 걸?’ 같은 말을 들으며 맘이 어지러워지는 순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되기까지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에게 충고 아닌 충고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냥 꼰대일 뿐이었다. 본인들이 사는 삶이 ‘옳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마다 각자가 만족하는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렸던 나는 그런 사람들의 말에 흔들렸지만 이젠 적당한 거리를 둔다. 굳이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가까이하면서 아까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제 ‘인생의 시간표’에 따라 사는 것보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 집중하자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워너비 미래상은 ‘우아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인데, 딱히 롤모델이 있는 건 아니지만 노력하는 것들은 몇 가지가 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소통할 것(내가 말하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더 잘 들을 것), 역지사지로 내가 듣기 싫은 말을 남에게 하지 말 것, 예의를 갖출 것 등. 앞에서 언급한 내가 만족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떤 나이 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자기만’ 만족하는 것이지 남에게는 당연히 민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꼰대일테고. 적어도 나라도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이런 내가 하는 작은 노력들이 나의 품위를 높이고 나아가 우아하게 보이도록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세상이 한 번에 좋아질 순 없겠지만 나 하나라도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세상이 눈꼽만큼씩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 어쩌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냥 부정적이기보단 조금은 긍정적으로 살아보자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생의 시간표’처럼 예전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최근 들은 말 중에 크게 공감했던 것 중 하나는 ‘SNS의 다른 사람들의 하이라이트 컷을 나의 비하인드 컷과 비교하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인생을 다 살지는 않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레퍼런스로 삼는 것을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만의 속도로 내가 좋은 삶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그러니 ‘인생의 시간표’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나만의 시간표를 만들어 나아가 보자.
※ 제목 표지의 그림은 우지현 작가님의 '바닷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