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는 아닙니다만

나를 희생하기에 저는 아직 모자란 사람입니다

by 애나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 중 명절이 되면 크게 다가오는 것 하나가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비혼주의자가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결혼이라는 이벤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아닐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세상에 100%는 없으므로 앞으로 남은 긴 인생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장담은 하지 않는다)


나는 소위 버블 시대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없는 집안의 똑똑한 장남으로 그 시대의 클리셰대로 명문대 상대를 졸업하고 손꼽히는 대기업을 평생직장으로 꽤 높은 임원으로 퇴직하셨고(소위 말하는 자수성가) 엄마는 전업주부시다. 뭐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이런 루트를 밟으려면? 당연히 일과 가정의 양립은 어렵다. 워라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였으니 회사에 올인한 아버지는 새벽 퇴근은 기본에 주말은 자신의 취미를 위해 썼다. 오죽했으면 내가 4~5살 꼬마일 때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거야'라는 말을 했을까… (이건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얘기인데 웃으면서 말씀하셨지만 아마 일정 부분 엄마에겐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엄마 미안)


엿튼 자라는데 큰 어려움도 없었고, 부모님은 경상도 출신 성정의 표본으로 살갑진 않으셨지만 크게 불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이미 어릴 때부터 결혼이라는 게 마냥 행복으로 가는 입구가 아니고 서로의 희생이 필요하며, 특히 한 사람의 희생이 더 요구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이야 어떻든 K-모범생으로 크게 튀지 않게 양육된 나는 남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시간표를 따랐다. (‘당연한 '인생의 시간표' 따위는 없다’ 참고) 대학은 가야 하니까 공부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대학을 졸업하면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적당한 시기에 결혼해 아이가 있는 가정을 이룰 것이라고 막연하게 예상했던 것이다.


정작 남들이 말하는 결혼적령기이자 한창 연애해야 할 시기에 유학을 갔고, 2년 만에 박사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취직을 하면서 이어진 바쁜 생활에 더더욱 결혼과는 멀어져 갔다. 이즈음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신혼이거나 결혼생활 초반이었는데, 재미있게도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공통된 의견을 피력했다. 그들이 신혼 3개월 내의 사람들이라면 ‘결혼해서 너무 좋아, 꼭 해야 해’라며 얼굴 가득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1년 안팎이 되면 강약의 정도만 다를 뿐 남편과 시월드에 대해 성토를 하면서도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라고 하다가, 시간이 더 흐르면 '그냥 혼자 살아. 그게 최고야'로 귀결되었다. (물론 일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모집단이 매우 빈약함을 밝힌다)


물론 나도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평생지기 내 편이 있고(당연히 판타지), 우리를 닮은 아이가 생기고, 소꿉놀이 같은 살림살이를 하며 알콩달콩하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이미 어릴 때 결혼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아이는 이런 생각들이 말 그대로 ‘상상’ 일뿐이라는 생각이 몸 어딘가 각인되어 있었고, 지인들의 부정적인 의견들은 나의 자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특히 핵심 키워드인 ‘희생’을.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는 황선우 작가님의 선배가 했다는 결혼생활에 대한 한마디가 나온다. 그건 바로 ‘둘만 살아도 단체생활’이라는 것인데, 단체 생활이 잘 유지되려면 사소한 부분까지 맞춰가야 하고 이때 서로 포기해야 하는 작은 것들 또한 넓은 범위의 희생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하기 위해 이런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매우 회의적이 되었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물론 이 감정이 영원하진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사람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해도 상대방과 필연적으로 엮인 가족들과의 관계, 그리고 사랑의 결실이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의 더 큰 희생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나는 아직 그런 인격을 갖추진 못한 것 같다.


아직도 나의 주변 사람들이나 특히 새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결혼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표한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또는 시기에 쫓겨서 내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괴로워하기보단 일을 벌이지 않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나는 나의 결혼이나 인생에 별 관심도 없으면서 ‘결혼은 해야지, 나중에 외로워’라고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그러게요, 좋은 일 생기면 제일 먼저 연락드릴게요~’ 라며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과연 그들은 결혼으로 외롭지 않게 되었을까?) 하지만 비혼인들을 비정상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받는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정상 vs. 비정상의 대결이 아닌 다름일 뿐이데도 말이지. 그래서 최근 활발해지는 '정상가족'이라는 개념의 탈피 및 의식 변화가 반갑다. (추후 나의 미래 생활에 대해 말할 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 이제 결혼이라는 게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것을 제발 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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