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사
나는 대한민국의 경제가 한창 부흥하던 시기의 끝자락에 태어났다. 그때도 가지고 태어나는 수저의 색은 달랐겠지만, 아직은 본인의 노력에 따라 그 색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 시기였던 듯 하다. 그 한예가 나의 부(父)다. 나의 부는 시골 깡촌에서 태어났고 매우 똑똑했지만 돈이 너무 없어서 맘껏 공부만 할 수는 없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내가 태어날 당시는 가장 한 명이 받는 대기업 월급으로 4인 가족의 생활은 물론 서울에 집도 장만할 수 있어고 산아제한도 있었다.(지금은 상상 불가능한)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이미 유아기 때에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을 만큼 맹랑했다.(물론 내가 이말을 했다는 것은 엄마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입에 담을 만큼 그 시기 부(父)의 존재는 미미하다. 물론 때마다(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선물도 받고 여름 바캉스를 가기도 했었지만, 대부분의 날들에 부는 부재했다. 평일엔 내가 잠들기 전에 퇴근하는 일이 드물었고 주말은 본인의 취미생활을 해야 했으니까. 그 당시엔 사회생활, 특히 우리나라 대기업의 생리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지만 이제 내가 그 대기업에서 일하고 보니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일엔 계산서가 따르는 법. 회사에 올인한 부는 대기업 임원으로 정년을 마감했지만 나와의 관계는 좋지 않다.(물론 어린 시절의 부재가 불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그런 부 덕분에 궁핍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받은 나는 개떡 같았던 수능시험을 말아먹고 원하는 전공을 택하진 못했지만 원래 가졌던 꿈이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었는지 그럭저럭 서울의 4년제 대학 화학과에 입학해 석사까지 마쳤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까지 갔으나 역시 박사과정을 마칠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박사과정은 ‘재미’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에서 수학하는 2년 동안 ‘무엇’을 발견하기는커녕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진리에 따라 나는 박사과정을 신속히 정리하고 마지막 학력을 해외석사로 마무리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나는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고 한국 기업의 취업 조건 중 특히 여자에게 중요한 건 '나이'라는 것을 구직 활동을 하며 실감했다.(10년이 넘은 현재는 좀 다르길 간절히 바란다) 이제 막 미국에서 돌아와 ‘취업뽀개기’가 얼마나 험난한 일이지 알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원래도 계획적이지 않은 데다 도전적인 성격도 아니다) 딸랑 4개의 대기업에만 입사 지원을 했고,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거쳐 어찌어찌 우리나라 최고 대기업 중 한 곳에 입사했다.(브런치북 '그냥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취업기 참고)
구직활동을 하고 입사할 당시에는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도 몰랐을뿐더러 대기업이란 곳의 생태계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도 몰랐다. 내게 어떤 파란만장한 길이 펼쳐질지는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물론 같은 부류의 회사에 이미 근무하는 친구들이 없지 않았지만 무릇 사람이란 남의 충고나 경험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는 한 그저 흘려들을 뿐) 물론 회사 다니는 게 행복해 죽을 것 같은 사람이 1%는 존재할까? 다들 나름의 힘듦과 괴로움을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같은 상처를 입은 100명의 사람들의 흉터는 제각각일 것이고 나라는 사람은 14년의 회사생활동안 입은 내/외상으로 완전히 연소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성마저 재가되기 전에 우선은 그곳에서 발을 빼는 선택을 했다.(간이 콩알만해서 완전히 빼지는 못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엮으면 소설 한 권은 뚝딱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나 또한 14년 동안의 자잘한 에피소드만 엮어도 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한번 써 보기로 했다. 바로 그 나만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