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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 May 03. 2024

사람에게 에너지 쏟지 말아요.

뒤통수밖에 더 맞겠어요

  나는 어릴 땐 매우 내성적이었으나 사춘기를 거치면서 외향적으로 변했다.(엄마에 의하면 중학생 시절 드라마틱하게 변했다고 한다) 그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주저함이 별로 없게 되었지만 사교적인 성격과 별개로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매우 한정적이고 인간관계에 있어 바운더리가 확실한 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성향은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바탕이 되어 언제 어디서든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관계 철학이 나를 더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회사 생활을 하며 알게 되었다.


  그들만의 리그 속 남자들은 일 잘하는 여자들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동시에 그들이 친하게 지내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지 못했다. 내가 일하던 부문은 업무 특성상 여자들이 많았고, 신입사원에 여자가 꼭 있었는데, 나의 상사들은 그녀들이 들어오는 족족 나를 사수로 지정하고 어느 정도 교육이 끝나 일을 좀 할 만할 때가 되면 자기 밑의 남자들에게 배치했다.(그럴 거면 처음부터 사수를 그 사람으로 정하면 되잖아요?) 최종적으로 누구와 일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사수였던 후배 여사원들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가 생겼고 연대감이 깊어졌다. 호칭만 서로 직급으로 불렀다 뿐이지 친한 동생처럼 지내며 함께 여행도 가고 고민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중 한 후배 A가 나와 이해관계가 얽힌 일을 회의 석상에서 이슈화했다. 사실 그 일은 면대면으로 얘기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A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당시엔 이해도 가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A는 알코올력이 상당했고, 후에는 무능하고 남성중심적인 상사의 오피스 딸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어쨌든, 그 이후 A와 소원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차피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성격인 데다 뭐 어차피 뒤통수칠 사람이었다면 그냥 이 정도 수준에서 관계가 멀어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일하는 분야도 달라져 부딪칠 일도 별로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A가 꽤 오랫동안 사내연애를 하고 결혼식 날짜까지 정해진 후에야 커밍아웃을 했다. 이 시점에서 나에게 A는 관심밖이 된지라 그저 축하한다 말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동기이자 또래로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후배 B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B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A의 소식에 놀라는 사람들을 보고 A가 즐거워하던 반응에 인간적인 실망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후에 A 커플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나는 어쩌다 그녀의 어머니와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뜻밖에 나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녀가 특진하는데 도움을 줘서 감사하다고 했나?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했나? 그런 류의 인사였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그때 어머니의 말씀에선 다른 숨은 뜻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A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를 소개받자마자 그런 이야기를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설혹 그녀가 나에게 일말의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녀에게 맞은 뒤통수의 아픔이 희미해지지는 않았다.


  앞의 일들을 겪었을 당시만 해도 나는 미성숙한 인간이었기에(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도 그런 것 같지만)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그 경험들은 이후 내가 인간관계를 맺을 때 마냥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뭐랄까, 나만의 방어막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 물론 그것이 내 인생 전체에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건너들은 말들에 의하면(나도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상엔 아무 상관없는 얘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A는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뭐 그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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