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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 May 10. 2024

결국 나는 '도망'을 선택했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 했던 것들과 앞으로의 바람

  얼마 전 핸드폰의 메모장을 정리하면서 내가 오래전 이미 번아웃에 다다랐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 독실하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참석하던 미사에 더 이상 가지 않게 된 것도 핑계라면 핑계지만 나를 괴롭히던 무능한 상사 때문이었다는 것도. 일찍부터 꼭 필요했던 휴식의 시간을 갖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천주교에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일 년에 두 번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는데 이를 통해 크고 작은 죄를 고백한 후 용서받는다. 주니어 엔지니어 시절 나의 고해성사 내용은 매번 거의 같았다. 바로 빌런 상사를 미워하는 마음, 처음으로 누군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과 그에 따른 괴로움. 내가 했던 마지막 고해성사에서 신부님은 나에게 물으셨다, ‘여기서 성사를 하고 난 후 그 상사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나요?’ 나는 잠시 생각 후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그럼 그냥 마음 가는 데로 두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진 듯했다. 그 후 적어도 나쁜 생각을 하는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하지만 상사의 괴롭힘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더 이상 미사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상반되는 용서의 마음을 갖지 못한 채 입으로만 보는 미사가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속 휴직에 대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불안정한 상황과 빈혈 수치가 의사가 걱정할 만큼으로 떨어지고 종국엔 코피가 멈추지 않아 한밤중에 응급실에 가야 했을 때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몇 년은 걸렸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상태를 주변인들이 모를 리 없었으니 대부분은 잘한 선택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휴직을 선택하기 전의 긴 시간이 암흑이었을지라도 나름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불빛으로 존재했기에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애써 차단하고 있는 중이다.


  휴직을 결정하고 후배에게 인수인계를 해나가던 어느 날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료가 대화 중에 나에게 말했다. ‘어쨌든 도망가는 거잖아요’라고.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생각했고, 그 사람의 성향상 그것이 나를 비난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당시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크게 비약되어 결국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으며,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마음에 만들어졌다. 그런 마음들은 몇몇을 제외한 인간관계를 모두 단절하게 만들었다.


  휴직 후 시간을 가지고 나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을 글로 풀어내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나의 휴직은 ‘도망’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내가 계속 회사에 있었다면 나의 멘탈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더 나쁜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거기서 도망쳐야 했고, 그 당시엔 불구덩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이 진짜 지옥인지, 아니면 나의 흐려진 판단력으로 만든 상상의 불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퇴사를 하지 못했던 건 어쨌든 아직 남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을 유지하기 위해 나에겐 ‘돈’이 필요하고, 회사는 나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곳이기에 함부로 그만두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이 넘는 휴직 기간을 보내며 최근 나는 나 스스로 매우 나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무기력과 우울에서 벗어나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직접 감각할 수 있다. 물론 다시 복직을 하면 또다시 예전의 상황으로 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내가 복직해야 하는 곳은 더욱 강한 불구덩이가 된 듯하다) 하지만 그동안 깨닫게 된 많은 것들이 나의 심지가 되어 더 굳건한 나로 그곳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중 몇 가지를 꼽아보면 '누군가에게 마음이 간다면 최선을 다해 마음을 전하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말 것.', '누군가 나를 이용하려 들거나 나를 동등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관계를 끊을 것' 그리고 '남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에 따라 판단할 것' 등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중요한데, 내가 생각보다 쓸데없이 '남'의 말이나 행동에 너무 큰 영향을 받고 상처받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발 '나'에게만 집중하는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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