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아름다움'이란 가당키나 한 걸까?
나는 원래 멋을 낸다는 것, 나를 돋보이기 위해 치렁치렁 다는 것을 질색했다.
어렸을 때부터 톰보이였고, 장신구도 별로 없었고, 즐겨하지도 않았다.
어떨 때는 ‘내가 남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장하고 꾸미는 것을 귀찮게 여겼다.
특히 헤어스타일에 신경 써야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천성이 반곱슬인 내가 대학생일 때는 찰랑찰랑한 생머리가 부러웠다.
그래서 몇 번이나 미용실에 가서 매직 파마도 해보았으나 이내 부스스해지는 머리카락. 어느 순간부터는 내 머리에 포기 선언을 했다.
그냥 하나로 질끈 묶고 다녔다.
내가 들이는 노력과 에너지에 비해 머리 스타일이 예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냥 머리를 밀고 다니면 어떨까?
‘머리카락이 없으면 머리 감는 시간도 아낄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세수하면서 머리까지 감아버리면 되잖아!’
란 생각이 들어 진지하고 심각하게 민머리를 고민했었다.
그러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일이 있었다.
사우나를 좋아하는 나는 여느 날처럼 대중 사우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피로를 풀고 있었다.
그런데 민머리 여성 두 분이 탕 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빛나는 머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민망해할지도 모르니 안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봤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들의 몸은 여자였지만 뜨거운 탕 안에 그 여성성이 숨겨지자 그들의 민머리만 남았다.
그 모습은 꼭 ‘나 남자요’하는 듯했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저렇게 여성성을 의심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나는 평소 딱히 여성스럽다는 것에 대한 기준을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민머리의 두 여성을 보고 나서 확실히 알았다.
‘아! 머리카락은 여성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도구구나!’
사우나 탕 안의 두 여성으로 인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잠시 후 그 두 여성분은 탕 밖을 나가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 씻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 나의 눈길은 그들을 쫓고 있었다.
그들은 몸에 비누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을 씻으면서 머리까지 단 한 번의 비누칠로 끝내는 게 아닌가?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다 그중 한 사람은 면도칼을 꺼내더니 민머리를 쓱쓱 면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머리카락이 없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 사람은 단 1mm의 머리카락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 그대로 빡빡 밀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비누칠로 마무리.
그러다 대조적인 풍경을 보게 되었다.
그 뒷줄에서 씻고 있는 한 여성은 허리까지 오늘 머리카락을 지녔다.
옷을 빨듯이 그 긴 머리카락을 빨래하고 있었다.
그 긴 머리카락은 얼마나 여성스럽게 보이던지!
내가 중동에서 살 때였다.
중동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여겨 머리카락을 히잡이라는 천으로 감싼다.
심지어 용모 단정해야 할 승무원조차도 중동 여자는 히잡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싼다.
누군가 자신의 생(生) 머리카락을 보면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며 자신의 머리털 하나라도 보일까 꼭꼭 숨겼다. 그런 문화를 보면서 폐쇄적이고 여자가 불쌍한 문화라고 안타깝게 느꼈다.
하지만 사우나 안의 민머리 두 여성분을 보고난후, 머리카락이 얼마나 여성성을 나타내는지에 대해 단번에 알게 되었다.
머리카락을 기르지 못하고 아이들 핑계를 대며 늘 단칼에 쳐대는 나도 머리 스타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여자임을 알려주는 나의 고마운 머리카락.
아이들이 태어나고 엄마로 살면서 나의 '여성성'에 대해 거의 손을 놓고 살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의 여성성을 숨겨놓고 살았다.
그러면 다 이해하고 통용된다고, 오히려 더 '엄마'스럽다고 위로아닌 위로를 했었다.
이제는 내 여성성에 대해 깨닫고 나의 짧은 단발 머리카락이 나를 여성으로 만들어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고 여자로 보이는데 이 머리카락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비록 이젠 새치가 꽤 많은 나의 머리카락이지만.
이들이 내가 여성임을 알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