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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n 22. 2022

어렸을 때 난

어렸을 때 난 ADHD였다. 

2014년쯤인가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에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다. 심리상담은 어딘가 아파서 정신병원에 가야 할 정도인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당시 나는 이상형의 내 모습과 현실의 내 모습의 괴리가 상당히 아주 많이 큰 아이였다. 내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예 시도하질 않았다. 난 체육시간을 싫어했다. 남보다 운동을 못하는 내가 싫었으니까.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다른 아이처럼 열심히 재미있게 공놀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마음과는 달리 더더욱 체육시간이 싫어졌다. 남들처럼 똑같이 공차면서 놀고 싶었지만 공놀이를 못한다는 걸 아니까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농구를 할 때 나와 똑같은 거리에 있는 상대편 사이로 공이 날아올 때 난 상대보다 항상 반 박자에서 한 박자가 늦게 몸이 움직였다. 마음은 늘 몸을 앞서 나가지만 그건 내 상상일 뿐, 공은 늘 상대방 차지였다. 2-30대 웨이트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10번이면 배울 동작을 난 100번은 연습해야 했다. 아마도 운동을 못했던 어머니를 닮아서인가 그런가 보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왜냐하면 쌍둥이 동생(난 이란성쌍둥이다. 내가 형)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보통 애들처럼 운동을 잘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내가 싸워서 맞고 있으면 동생이 나서서 “우리 형 때린 놈 누구야?”소리치며 상대방을 대신 때려준 적도 있다.    

  

난 인정받고 싶었다. 

운동을 비롯한 예체능은 노래 부르기 빼고는 정말 최하였다. 그래서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의 인정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계기는 4학년 9월 초에 우연히 만화로 된 김유신 전기를 읽게 됐다. 그때 김유신이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려고 동굴 안에 들어가서 “정신통일, 집중하자”라는 부분에 크게 감명을 받았었다. 그 당시 나는 위인전을 읽으며 위인들의 모습을 따라 했었다. 아문센을 읽고 나서는 그처럼 잘 때 추워도 창문을 열고 잤다. 그래서 나랑 한 방을 썼던 누나, 남동생 모두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이번에도 역시 김유신처럼 해보자는 생각에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집중해서 들었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 8월까지 내 성적은 모두 수우미양가에서 양 또는 가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김유신을 따라 했던 9월 시험에서 반에서 10등을 한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뒤에서 등수를 세는 게 더 빨랐던 내가 앞에서 10등이라니. 선생님의 칭찬은 내게 한 줄기 빛이었다. 그래서 공부는 내게 놓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5등 위로 올라간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평균 등수는 7등이었다. 그래야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그 시절 운동과는 달리 공부는 내가 살아가는 또 이뤄야 할 최소한의 목표였다.       


난 사랑받고 싶었다. 

왜냐고? 3살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7살까지는 이모할머니 밑에서 7살 이후로는 새어머니 손에 컸다. 이모할머니 집에선 정말 늦둥이로 사랑받으면서 잘 컸다. 그래서인지 가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막내 같다고들 한다. 둘째라고 하면 반쯤은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다. 문제는 새어머니 손에서 자라게 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누나, 동생 모두 느끼는 거지만) 항상 엄마가 있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다. 6학년 때였나? 집주인 아주머니와 늦둥이인 아들이 다정하게 대문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은 없다. 새어머니가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하면 새어머니도 누나와 나, 동생을 키워주느라 고생 많으셨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마치 애완견처럼 관심을 구걸하는 일, 그건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거다, 외면당했을 때의 비참한 기분을. 그와는 대조적으로 본인이 낳은 막내의 친구는 줄줄 외우지만, 누나나 나, 동생의 친구는 누구인지, 몇 학년 몇 반인지 모르셨다. 애가 많아서 다 알 수 없다는 변명을 하셨지만 난 다 알고 있었다. 누나를 비롯해 우리에게 관심이 없음을, 그렇게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란 20년 동안 내 안에는 상처받은 7살 정도의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성장을 멈췄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나 아내의 도움으로 상담을 하며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풀게 됐다. 이후 상처받은 아이는 조금씩 자라났다.     


가난했었다. 아주 많이 가난했었다. 

집세는 항상 밀려 있었다. 하루에 한 끼 먹는 날도 있었다. 가난이 정점을 찍었던 3학년까지는 미술 시간이 두려웠다. 학교에 준비물을 사 가야 하지만 집에 말하지 못했다. 말해봤자 못 가져갈 것을 알기에. 그렇게 미술시간이 되면 준비물이 없다고 선생님께 맞거나 혼자 뒤에서 일어나 수업을 받아야 했다. 선생님들이 미웠고 준비물이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당시엔 2교시가 끝나면 희망자에 한해 우유와 빵을 먹는 시간이 있었다. 참 괴로웠다.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 못 먹었다. 맛있게 먹던 짝꿍이 나 먹는 거 보지 말라고 했었다. 옷은 늘 주위에서 남들이 입던 옷을 구해다 입었다. 놀다가 신발에 구멍이 나면 큰 걱정을 했다. 신발 살 돈이 없어서 본드로 깔창을 붙이거나 여러 수선을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될 때 신발을 샀다. 물론 브랜드 없는 시장표 신발이었다.      


키가 작고 연약했다.

그래서 애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다. 싸울 때마다 쥐어터지기 일쑤였다. 반에서 키가 제일 작은 것도 모자라 그 학년 전체에서 키 작은 걸로 1-2등을 다툴 정도였다. 그래서 몸으로 하는 걸 두려워했다. 친구나 선배들에게 억울하게 당할 때도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고 1 때 매점에 가다 2학년 선배와 가볍게 어깨를 부딪혔다. 왜소해 보인 내게 그 선배는 욕을 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다 때리고 교실로 들어가는 그 선배를 보며 속으로 투덜댔다. 동급생에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했다. 싸워봤자 항의해봤자 내게 돌아오는 건 교묘한 보복 또는 주먹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13년 차 소방관이며 두 아들의 아빠, 사랑받는 남편이다. 이 모든 걸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 주변 사람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나만큼 힘들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시간순으로 쓸 예정인데 이 글을 읽고 힘내셨으면 잠시 쉬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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