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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Sep 28. 2023

새엄마랑 살며 서러웠던 일

1984 ~ 2004

1. 구박받아서 늘 떠나고 싶었던 집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1989년의 어느 여름날, 여섯 식구가 살던 2칸짜리 방이었다. 좁은 건 아무 상관없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점심 무렵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난 후딱 자라 이 집에서 벗어난 이후를 상상하고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내가 가출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집의 분위기가 너무 싫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항상 그런 바람이 마음속에 있었는지 친척집에 가서 며칠 묵고 올 때면 그곳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생각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날도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집의 분위기가 어땠냐고? 우리 집 구성원은 아버지, 새엄마, 그리고 새엄마가 낳은 막내 동생 그렇게 세명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 외 명목상으로는 한 가족이지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누나, 나와 남동생(이하 우리로 지칭, 나와 남동생은 이란성 쌍둥이)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막내는 뭐든 특별대우를 받는 특권층이었다. 대신 나를 비롯한 천덕꾸러기 3형제는 거의 천민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예를 들면 가난했던 우리 집은 초등학교 때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8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분들은 다들 알 것이다.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학생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특히나 만들기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준비물이 없으면 옆에 앉은 짝이 만드는 모습을 그 시간 내내 지켜봐야 했다. 그나마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을 땐 준비물이 없다고 벌을 받거나 교실 뒤에 나가 서 있는 일은 없었다. 손바닥에 매를 맞거나 생활기록부에 아이 준비물 좀 챙겨 보내라는 문구가 적히는 건 다반사였다. 그래도 부모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선 아버지는 무관심과 방임으로 자식을 돌봤고(나중에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들어보니 죽은 전처가 낳은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주면 꼭 그날 전처 자식에게만 잘해준다며 새엄마와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우리에게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어렸을 적부터 무수히 쌓인 상처는 아버지의 몇 마디 말에 나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엄마는 가난했다는 핑계로 우리가 학교에 오가는 것 외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은 우리에겐 사치였다. 준비물만 못 가져갔을까? 4학년이 된 이후 1주일에 한 번 정도 도시락을 싸 가는 날에는 간혹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하는 애가 50명의 아이들 중에 2~3명 정도는 있었다. 그들중에 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왜 새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냐고? 어차피 해주지 않을 것을 아는데 말해 뭐 하나? 내가 새엄마와 같이 살았던 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새엄마와 우리(누나, 나, 남동생)는 무늬만 가족이었다. 감정의 거리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떨어진 만큼 아주 멀리 있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상호 교류라고 부를만한 전혀 없었다. 자식의 친구 이름을 모르는 부모를 본 적이 있나? 새엄마는 그랬다. 우리의 친구 이름은 하나도 몰랐다. 그와 반대로 자기가 낳은 딸인 막내의 친구 이름은 줄줄 외웠다. 그 정도면 관심의 정도가 어땠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다정히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을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89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오후 5시경 남동생과 신나게 놀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무렵 주인아줌마와 그 아들이 서로 손잡고 다정하게 나가는 모습을 봤다. 그와 동시에 나와 동생은 자연스레 눈시울이 벌게지며 침울해졌다. 왜 그랬을까? 그냥 부러웠다. 저렇게 손잡고 같이 걸을 수 있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러웠다. 새엄마와 같이 산 20년 동안 우리는 부모와의 스킨십을 경험한 적이 1년에 몇 번 사진 찍을 때 의례적으로 취하는 포즈 말고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늘 정에 굶주렸고 부모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손길이 그리웠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눈시울을 자극하는 모습을 봤으니 눈물이 나오지 않고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 먹이를 찾는 고양이처럼 늘 주변을 헤맸다.     

 

3. 태권도 선수의 꿈을 저버리다


5학년 때부터부터 6학년까지 열심히 태권도 도장에 다녔다. 난 당시 태권도 선수 출신이었던 사범님의 권유로 태권도 선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물론 내가 태권도에 소질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태권도가 좋았다. 늘 키가 작고 약해 아이들에게 맞고 다니는 게 싫었고 이번 기회에 나도 멋있는 모습으로 변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범님의 권유에 바로 좋다고 대답했다. 절대 운동을 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땐 운동선수를 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다. 다만 선수를 시작하려면 1단 심사에 먼저 합격해야 하니 1단 심사부터 잘해보자고 했다. 문제는 태권도 1단 심사비용이 5만 원이라는 사실이었다. 89년에 5만 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얼추 30만 원 정도쯤이다. 그런데 내가 태권도 선수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1단 심사를 봐야 하는데 심사비용이 5만 원이라는 말에 새엄마는 당장 그만두라는 대답을 했다. 물론 우리 집 형편에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당장의 심사비용이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난 태권도 선수를 하고 싶어 그 당시 내 성격과는 다르게 몇 번이나 졸라봤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매몰찬 거절과 함께 꿀밤 세례였다. 새엄마는 심사 보지 말고 그냥 태권도 도장만 다니라는데 그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결국 나는 심사를 보지 못했고 태권도 도장에서는 나 빼고 6명 모두 1단 심사에 합격했다. 검정 띠를 매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돈이 없어 심사를 치르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사범님은 그런 내 사정을 알고는 아이들 없는 한가한 시간에 도장에서 따로 아버지를 만나 날 운동선수로 키워보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아버지는 도장에서 운동하는 체육관비 외엔 더 이상 지원이 어렵다며 선을 그었다. 결국 난 심사도 못 치르고 정말 하고 싶었던 태권도 선수의 길은 걸어보지도 못했다. 그 후 1달이 못 되어 태권도 도장에 나가지 않았다.

     

PS. 그 결말을 아버지와 새엄마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거 네가 하기 싫다고 안 한 거잖아” 참 쉽다. 누군가의 앞길을 막고 그걸 남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은.     


4. 저녁 12시에 도시락 설거지하는 고3 수험생


95년 난 고3이었다. 주변에서 수험생인 내 친구들은 집에서 최고로 대우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23시 30분에 야간 자습이 끝나 집에 00시 넘어 도착하면  제일 먼저 도시락 2개를 물에 담가놓았다. 그래야 도시락이 물에 불어 설거지하기 쉬우니까. 그리고 샤워 후 간단히 밥 한 공기를 먹고 잠들었다. 고3이 된 후 한 달 만에 45kg에서 39kg으로 살이 빠져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다. 고3이지만 도시락 설거지부터 다음 날 아침 새 도시락에 밥을 담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우리 집에서 고3이라 특혜받은 건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남들이 고3 시작부터 먹기 시작하는 보약 대신 새엄마가 10월쯤부터 11월 수능 전날까지 배즙 먹으라고 준 게 전부였다. 당시 우리 집 규칙은 냉장고에 과일이나 맛있는 게 있어도 새엄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배즙을 2달동안 먹었던 일은 큰 혜택이었다.         


간혹 늦잠을 자는 경우에는 아버지에게 학교까지 태워달라고 하는 것도 새엄마에게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그마저도 분기에 1~2번이 전부였지만 그럴 때마다 게을러서 그런다며 늘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부탁하기보다는 지각하면 늦은 벌로 팔굽혀펴기를 50개씩 하는 걸 택했다. 집에서의 특별 지원, 그런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기대를 않으니 실망도 하지 않게 되었다.     

 

5. 몸살 걸린 아들에게 게을러서 그런다며 내쫓은 사람


전에 썼다시피 난 군 제대 후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특히 약 1년간은 명절 말고는 쉬는 날 없이 일하기도 했다. 그 스케줄은 평일 09시~19시는 식자재 도매상(월~토), 주말 19시~다음 날 06시 주차장 요금 정산(토~일)으로 이뤄졌다. 특히 토요일과 일요일은 늘 밤에 잠을 못 자며 일해야 했다. 토요일엔 아침 8시부터 작해 식자재도매상과 주차장에서 일요일 06시까지 일했고 조금 쉬다가 19시부터 월요일 아침 06시까지 주차장 요금 정산 후 근처 목욕탕에 들어가 잠깐 씻고 다시 식자재 도매상으로 출근해 월요일 저녁 7시까지 일하는 식이었다. 주말 이틀동안 자는 시간을 포함해 쉬는 시간이 고작 13시간인 삶을 살았다. 식자재 도매상에선 물건을 5톤 이상 나르는 일을 했다. 스물서넛 한창 때라지만 잠 안 자고 몸을 혹사하니 환절기마다 몸살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새엄마는 우리가 집에 있는 자체를 싫어했다.(그래서 어릴 때부터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아파서 누워있는 나를 보며 젊은 놈이 뭐가 아프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그 말을 듣고서도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카페나 롯데리아에 앉아 있다 어두워지면 들어왔다. 다행히 어두워진 후 들어와 자는 건 따로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덧붙이며

이런 서러움을 겪어서인지 어릴 때부터 아들 둘을 정말 많이 안아줬다. 다만 명령조의 말투는 고치지 못했지만. 다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조금 맺힌다. 어쩌다 이런 한탄조의 글을 쓰게 됐는지, 여러 번 퇴고를 해봐도 그대로라 그냥 올립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서러움을 검색하니 가장 먼저 나온 사진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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