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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n 22. 2022

학동 할머니와 새로운 가족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는 혼자서 세 아이를 모두 돌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나랑 남동생은 작은 어머니 댁으로, 나는 이모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할머니 입장에선 나를 맡는다는 게 힘들고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좋았다는 느낌만 가득할 정도로 그곳에선 난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막둥이로 잘 자랐다.


6.25 참전용사이자 시청 공무원이었던 할아버지, 아마도 내가 할머니 댁에서 자랄 때쯤에는 정년퇴임이 몇 년 남지 않았던 때로 생각된다. 할아버지 출근길에 따라간다고 졸라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무실에 갔던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다른 분들이 상사였던 할아버지께 인사하자 내가 덩달아 으쓱했던 당시의 기분도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날 예뻐하셔서 술자리마다 항상 날 데리고 다니셨다. 워낙 자주 술자리에 데리고 가니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드시고 남은 술을 혼자 먹고 취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엄마처럼 날 키워주신 할머니를 아직도 떠올릴 때면 아련한 느낌이 든다. 슬픈 것도 아닌데 그냥 가슴 한 편이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 참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엄마였던 할머니다. 내가 아이 둘을 키워보니 알겠더라. 당시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를. 


그 당시는 지금처럼 일회용 기저귀가 없었다. 면으로 된 하얀색 천(가로 60cm, 세로 80cm)을 여러 번 접은 후 구멍가게에서 파는 노란 고무줄로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에 고정시켜 썼다. 하루에 기저귀 빨래는 기본 10벌 이상일 텐데, 세탁기도 없던 그때 일일이 손빨래하고 빨랫줄에 말리고 다시 기저귀 채우기, 참 생각만 해도 일이 많다. 


난 밥도 잘 먹지 않았고 잘 울었다. ADHD 성향 때문이었을까? 한 번 울 때면 1-2시간 이상 심하게 울 때도 있어서 주변 어른들이 나를 가리켜 “쟤는 좀 유별나다”란 말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한참 울 때면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저 눈물이 나와서 계속 칭얼댈 때도 있었다. 할머니 입장에선 죽은 조카의 아이를 맡았을 뿐인데 순한 놈이 오지, 왜 까다로운 녀석이 와서 힘들게 하나라도 생각을 하셨을 법한데 그저 사랑으로 키워주신 것만 생각난다.


행복한 기억 하나가 있다. 아침 먹은 지 얼마 후 점심으로 만두를 먹자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 오고 밀가루로 만두피를 만들고 주먹만 한 만두를 만들었다. 지금의 왕만두만 한 크기에 사각형의 만두였던 걸로 기억난다. 꽤 커서 그릇에 담을 때면 만두 4-5개면 그릇이 꽉 찼던 모습도 생각난다. 만두를 만들면서 가족끼리 도란도란 얘기 나누던 모습, 만두피를 만들겠다며 옆에서 떼쓰다, 낑낑대는 내 모습이 있었다. 뜨거운 만두를 먹지 못해 애태우던 일, 그때 일을 떠올리면 그저 미소만 한가득이다. 그땐 아무것도 그립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몰랐고 몇 년후엔 낯선 집으로 들어가 새로운 가족들(몇 년 만에 만난 아버지, 누나, 동생, 새어머니)과 부대끼며 살아야 되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이별의 순간이 힘들어서, 할머니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련해졌나 보다.  


4년간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초등학교 갈 무렵 할머니와 떨어져 아버지, 새어머니와 누나, 남동생, 여동생과 살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원래 가족과 사는 거지만 왜 그리도 낯설었던지, 식사 시간도, 새로 본 여동생도, 몇 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누나, 남동생도 모두 싫었다. 그저 할머니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다.


새로운 분위기를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비유가 적절할까? 온대 지방인 한국에서 잘 살다 아무런 연락 없이 하루 만에 추운 알래스카에서 살아야 한단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새 집으로 갈 때까지 무던히도 울었다. 아마도 5시간 넘게 울었으려나? 낮에 할머니 집에서 나와 저녁에 새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리 울었다. 내겐 최초의 저항이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다. 나를 비롯한 전처의 자식 3명을 키우는 새어머니와 그 새어머니가 낳은 여동생, 총 6명이 사는 새 집은 낯선 감옥이었다. 당시 난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무인도 같았다. 내 편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작은 어머니 손에 자랐던 9살인 누나와 7살 남동생은 이미 끈끈한 유대가 맺어졌고(물론 나중엔 같이 설움 받는 처지라 사이좋게 지냈다) 새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낳은 막냇동생, 그리고 나.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게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어렸을 적 내가 자랐던 집의 분위기는 늘 차가웠다. 그래서 집이 싫었다. 여름이나 겨울 방학 동안 잠깐씩 친척 집을 다녀오고 난 후엔 집의 딱딱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싫어서 창문 밖을 하염없이 내다볼 때가 많았다. 20년을 키워준 새어머니에겐 미안하지만 내 평가는 그렇다. 그래서 늘 고모집이나 이모집이 좋았고 키워준 할머니가 생각났다. 왜냐고? 그곳은 늘 따뜻했으니까, 


다 자란 후 누나와 남동생과 자랄 때 집안 분위기에 대해 얘기할 일이 있었다. 나만 집 분위기가 차갑다고 생각한 줄 알았는데 누나와 동생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막냇동생과는 달리 3남매(누나, 나, 남동생- 나와 남동생은 이란성쌍둥이다)는 늘 엄마의 관심을 갈구했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항상 채워지질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럴 수 없었겠지, 그게 맞는 건데 당시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인가 아버지와 이 문제를 얘기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자유방임주의를 활용하셨다. 참 편하게 애 키우셨다. 무슨 문제든 절대 개입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이 알아서 컸다. 아버지 曰 “그냥 키워준 것에 감사해라”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땐 인정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20년 넘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해한다. 


아버지의 말이 씨가 됐을까? 나를 비롯한 3남매는 자라서 키워준 것에 감사했고 지금은 자연스레 아버지와 3남매, 그리고 새어머니와 막냇동생 두 부류로 나눠서 지낸다. “Let it be” 그대로 놔둬라 그럼 순리대로 될 테니 그 말처럼 지금은 두 부류로 나뉜 게 아무렇지도 않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울 나이도 지난 지 한참이고. 그래도 글을 쓰다 보니 눈시울이 촉촉해지고 눈물이 흐른다. 아직도 어렸을 적 상처가 남아있는 가보다. 다 나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서 다행이다. 이런 내용으로 첫 상담할 때는 펑펑 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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