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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해군 훈련소 훈련병 사망사고

진해 해군 훈련소

by 거칠마루

IMF가 일어나기 전인 1997년 11월 3일 난 해군에 입대했다. 그 해, 경남 진해에 있는 해군 훈련소에는 11월 3일과 11월 24일 2 기수만 채우면 1997년에는 더 이상 입대하는 군인들이 없었다. 그다음 해인 1998년 입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해군 훈련소에서는 10년에 1번꼴로 훈련 중 사망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내가 훈련받던 1997년이 그 10년째 되는 해였다. 1997년 11월 말까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교관들 모두 1달만 버티면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들었다.


11월 3일 입대한 내가 해군 기수로는 417기(난 해양경찰이지만 해군과 같이 훈련 받음), 11월 24일 쌍둥이 동생(나와 내 남동생은 이란성쌍둥이, 같이 지원했지만 내가 3주 먼저 입대함)은 418기로 해군 훈련소에 들어왔다. 417기와 418기 두 기수 모두 사고 가능성이 높은 유격훈련과 사격훈련을 마쳐 두 기수의 교관들 모두 올해는 사망사고 없이 무사히 넘어가겠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리고 12월 중순쯤, 417기는 어려운 교육과정이 거의 끝나 마무리 중이었고 418기 역시 전투수영 등 몇 개 남지 않은 훈련과정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사망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전투수영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다. 25년 전 훈련받을 때를 기준으로 설명한다. 훈련병이 수영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수준별로 4개의 조로 나눈다. 그리고 오전에 몸풀기(몸풀기를 빙자해 운동장에서 심히 구른다) 2~30분 후 수영, 점심 식사 마치고 오후 몸풀기 후 수영 순으로 시작되었다. 수영장은 아래 그림과 같다.


해군훈련소 수영장 그림.png 훈련받을 당시엔 무서운 교관들 탓에 크기를 잴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공공연하게 구타가 있었지요.


그곳에서 아침 식사 후 수영, 점심 식사 후 수영 하루 온종일 수영만 한다. 수준별로 나뉜 조는 차례대로 줄을 선 상태에서 교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동시에 30m를 수영해야 한다. 일단 잠영해서 발차기→스티로폼 부이 들고 발차기→팔 젓기 등의 과정을 통해 속성으로 수영을 배운다. 30m를 수영하면 다시 원래 시작점으로 돌아와 내 차례를 기다리며 쉴 수 있는데 그 시간은 약 1분 정도여서 오래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이 지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회에서처럼 개헤엄을 쳤다가는 UDT 출신 교관에게 불려 가 오리발로 발바닥을 맞아야 했다. 무조건 여기서 가르쳐준 대로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수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UDT 교관의 불호령과 함께 오리발 매타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들리는 오리발 매타작 소리는 훈련병들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고 수영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이 행여나 UDT 출신 교관과 눈이 마주칠까 봐 다들 일부러 교관의 시선을 피하며 걸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수영을 마치고 밥을 먹으면 엄청난 운동량을 소화한 탓인지 훈련병들의 식욕도 덩달아 올라갔다. 커다란 식판에 다들 가득 담아 밥을 10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뱃속으로 밀어 넣은 채 소화되기도 전인 1시경 바로 오후 수영교육이 시작됐다. 또다시 오전 일과의 반복이다. 다만 밥을 먹고 바로 수영을 하게 된 탓인지 음식이 조금 역류해서 토하는 훈련병들도 있었다. 내가 입대한 417기는 별 탈없이 모든 훈련과정을 마쳤지만 97년의 마지막 기수인 418기는 불행하게도 그러질 못했다.


그날따라 점심메뉴로 닭국이 나왔다. 시간은 없고 배는 고픈 훈련병들의 특성상 빨리 그리고 많이 먹는다. 닭국 역시 살만 발라져 나오지 않았고 가느다란 뼈도 어느 정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빨리 먹다 보니 제대로 씹어서 삼키지 못했을 테고 그렇게 넘어간 음식은 한 훈련병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날 점심식사 이후 418기의 한 훈련병은 전투수영 도중 음식물이 역류하는 과정 중에 기도가 막혔고 이를 알게 된 교관들의 응급조치가 있었지만 밥, 닭뼈 등 많은 음식물이 기도를 막은 탓에 끝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떠도는 소문으로는 훈련병은 국립묘지에도 묻히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보상금 역시 쥐꼬리만큼 나온다고 했었다. 그 소문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최하층 계급인 훈련병에게 이와 관련된 소식을 알려주는 상냥한 교관들은 없었다. 공무원들의 특성처럼 쉬쉬하며 이 일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 기수인 417기는 훈련 막바지였고 418기는 아직 절반 정도의 훈련 과정이 남은 상태였다. 훈련병 모두 우울한 분위기였지만 죽은 훈련병에게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과정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아무 일 없듯이 사망사고는 지나갔다.


그 사망사고가 난 뒤로 좋아진 점이 하나 있었다. 원래 훈련 도중 감기약을 받으러 교관들에게 찾아가면 군기가 빠져서 감기에 걸렸다며 오히려 운동장을 뛰거나 기합을 받아야 했었다. 하지만 사망사고 뒤로는 손가락이 까진 상처마저도 교관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약품을 듬뿍 발라주었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면 감기약 정도는 풍족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한 훈련병의 죽음 때문이었다. 소 잃어봐야 외양간을 고친다는 말을 실감했다. 있을 때나 잘하지!


군의 부조리나 안타까운 젊은이가 군대에서 훈련받다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태어났고 아직까지 종전이 아닌 휴전 중인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군대는 상상도 못 할 부조리의 집합체임을 이 글을 읽고 있는 예비역들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그저 꽃다운 스무 살 무렵,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는 군대라는 곳에 갔고 첫 단계인 훈련소에서 훈련과정 중에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해줬으면 한다. 혹시라도 안타깝게 사고로 죽은 훈련병의 가족이나 지인이 이 글을 본다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아마 그이는 다른 세상에서 그만의 삶을 즐기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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