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초보 아내와 성수대교에서
2016년 여름쯤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대학 때 따놓은 2종 보통의 운전면허가 있었지만 장롱면허일 뿐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평생 기사 역할을 할 테니 아내에겐 운전할 필요 없다고 내입으로 말했었다. 결혼하고 10년쯤 살아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놀러 갈 때나 아내와 나의 집이 있는 전라도 광주를 내려갈 때 혼자서 400km 장거리를 왕복 운전하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농담 삼아 아내에게 운전해 보는 게 어때라며 넌지시 물어봤지만 아내의 대답은 단호했다.
“NO, 남편이 평생 운전기사 해준다고 결혼 전부터 약속했잖아. 나 운전 안 하고 기사가 운전해주는 차 타고 다닐 거야”
별 수 없었다. 내 힘으로는 아내를 운전시키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거의 포기했었다. 그래도 가끔 힘들 때면 넋두리하듯 한 마디씩 했다. “다른 부부들은 번갈아가며 운전한다던데, 그러면 조금 덜 피곤하다더라.” 아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날 무렵, 점점 생활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1명에서 다시 2명이 되고 그 아이들이 아픈 경우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다. 아이 둘이 번갈아가며 감기에 걸리면 2~3주 동안 3~4일에 한 번씩 병원을 데리고 가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나마 내가 비번일 때는 차를 타고 가지만 내가 일하는 날엔 아내가 둘째는 유모차에 타고 첫째의 손을 잡고 1km 남짓한 거리를 걸어가는 건 나은 편이었다. 거기에 눈이나 비가 내리는 날엔 더 힘들었고 아이 둘을 낳고 키우느라 약해진 아내의 손목 힘으로는 유모차로 20cm 남짓하는 보도블록 턱을 오르내리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런 일들을 6~7개월 이상 겪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폭탄선언을 했다.
아내 : 나, 이제 운전 배울 거야, 자기 옆에 태우고 연수받아야겠다.
차가 있으면 뭘 해, 운전을 못하니 있으나 마나지, 그동안 아이 둘 데리고 병원 갈 때면 많이 힘들었어
나 : (좋긴 하나 연수 같이 한다는 말에 불안함) 으응, 잘 생각했어...
그런데 운전 연수는 전문 교관이랑 함께 하는 게 낫질 않을까? 그런 차들은 조수석에서 브레이크 밟을 수 있게 장비가 설치되어 있다는데
아내 : (급 관심 보임) 그래, 한 번 알아볼까?
나 : 그래, 돈 주더라도 제대로 배우는 게 낫지, 얼른 알아보셔, 내가 애들 볼게
내심 반가웠다. 부부 사이에 운전 연수라니, 절대 안 될 소리다. 보나 마나 내가 운전 조심히 하라고 잔소리할 때마다 아내는 듣기 싫어할 테고 오히려 연수과정 중에 싸움만 날 것이 자명했다. 이럴 땐 피해 가는 게 상책이지, 연수받는데 돈 30만 원이 들어도 좋다. 제대로만 배워다오! 역시 아내는 검색의 달인이었다. 어떻게 검색하는지 몰라도 싸고 평판이 꽤 좋은 여성 강사님과 12시간에 30만 원 정도(6년 전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에 연수받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강사님의 차로 운전 연수를 하다 마지막쯤에 우리 차를 타고 연습하는 걸로 협의가 됐다.
처음 연수 시작하기 전만 해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사람이 연습 횟수가 점점 쌓이더니 선생님께 칭찬받은 걸 자랑하며 즐거워했다. 난 운전이 잘 맞나 봐. 어젠 주차도 한 번에 들어갔어, 오늘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 남양주 수동까지 갔다 왔다며 아이처럼 자랑을 했다. 운전 20년 차에다 1종 대형면허를 가진 내게(사고 경험도 많다 ^^) 그런 자랑을 하다니, 속으로는 우쭐하는 아내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절대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러다 속마음이 들키는 날엔...(많이 혼날지도 모른다)
연수가 끝나고 아내의 근무지가 국민대로 바뀌게 됐다. 이문동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국민대까지 가기엔 자가운전이 최고였다. 다만 종암경찰서 앞 사거리와 국민대 앞 고가도로 타는 것을 걱정하길래 국민대로 출근하기 전 미리 연습도 두어 번 했다. 아내의 연수 선생님이 칭찬했던 게 사실이었나 보다. 내가 운전 초보인 시절보다 아내가 운전하는 게 안정감이 느껴졌다. 몇 번 칭찬했더니 아내의 어깨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너무 치켜세웠나 싶었지만 자신감이 가득 찬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아내가 운전할 때면 지적보다는 칭찬을 하려 노력했다. 물론 항상 칭찬만 할 순 없었다. 주차할 때 창문을 열고 직접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라는 말을 할 때면 아내는 잔소리한다며 싫어했고 살짝 언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본인도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 듯 보였다. 아내가 운전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다. 아내는 운전에 재미가 붙었는지 가족끼리 어딜 갈 때면 본인이 먼저 운전해보겠다고 나섰다. 나도 내심 바라던 상황이라 그러라고 운전석을 내줬다. 강남 압구정역 쪽을 가는 길이었다. 성수대교야 항상 막히지만 그날따라 성수대교를 다 건넌 강남 입구에서 유난히 차들이 정체되었다. 10여분 쯤 기다려 겨우 100m쯤 갔을 때였다. 400m 앞에서 접촉사고가 있었는지 2개 차로에 걸쳐 사고 수습 중이었다. 다들 사고 수습 중인 2개 차선을 피해 가려는 것이 차가 막히게 된 원인이었다.
나 : 마누라, 차선 바꿔야겠다. 저기 앞에 사고 났다.
아내 : 어디, (내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보며) 아, 저기구나, 알았어. 그런데 차들이 안 비 켜주네, 어쩌지?
나 : 일단 깜빡이 켜고 틈 나면 천천히 옆으로 가봐.
아내 : 알았어.
나 : 앞차랑 너무 붙었다. 조금 떨어져서 가
아내 : (살짝 짜증이 남)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하얀색 BMW가 우리 차선 앞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내보다 조수석에 앉은 내가 먼저 발견하고 아내에게 주의를 줬다.
나 : 앞에 차 들어온다,
아내 : (아무 대답 없음)
나 : 브레이크, 브레이크
아내 : (그제야 브레이크를 밟고 멈춘다, 놀라서 아무 말 못 함)
아슬아슬 겨우 멈췄다. 정말 BMW의 뒷 범퍼와 우리 차와의 거리가 2cm쯤 남았다.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이 상황을 만든 아내에게 갑자기 짜증이 났다.
나 : (소리치며) 저게 얼마짜리 차인 줄 알아? 범퍼만 스쳐도 300이야. 운전 그렇게 할래?
아내 : (내 말이 끝나고 10초쯤 지날 때까지 놀라서 아무 말 못 함, 시간이 흐르자 그제야 본인도 화나기 시작함) 내가 일부러 그랬어? 일부러 그랬냐고?
나 : 내가 미리 얘기했잖아, 차 들어온다고, 그때 미리 정지했어야지
아내 : 나도 모를 수도 있지. 자기는 지금까지 사고 여러 번 냈으면서... 나한테만 뭐라 그래.
나 이제 운전 안 할 거야.
아뿔싸, 잘못 건드렸다. 아내는 정글의 왕 사자였고 난 그 앞의 약하디 약한 토끼였다. 그런데 토끼가 겁을 상실한 채 잠자는 사자의 턱수염을 뽑아버리고 말았다. 사고 날 뻔한 일을 따끔하게 경고하려다 정도가 지나쳐 내가 실수하고 말았다. 아내는 제대로 삐쳤는지 앞으로 내가 있으면 본인은 운전 안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동안 어르고 달래서 아내가 겨우 운전하게 만들었는데 내 꾀에 내가 걸린 꼴이었다.
아내에게 일부러 그렇게 소리친 게 아니라고 설명을 했건만 아내는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뒤였다. 미안하다고 여러 번 얘기해 겨우 풀어지긴 했지만 내가 있을 때면 운전 안 하기로 말한 건 여전히 유효하다며 앞으로 내 행동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다. 아이고, 사고 날 뻔했을 때 소리치지 말고 다정하게 얘기할 것을 이제야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22년 8월이다. 여전히 아내는 내가 있을 땐 조수석에 탄다. 어쩌다 한 번, 음,,, 아마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본인이 운전한다. 아직까지도 아내는 고속도로 타는 걸 좀 무서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무사고 6년 차다. 지금까지 교통사고만 10번 넘게 경험한 나보다 훨씬 낫다. 5년쯤 뒤엔 아마도 부부가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운전하지 않을까? 오늘도 살살 아내를 설득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