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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an 13. 2023

대리운전기사의 두 얼굴

지인의 음주운전 소식을 듣고

며칠 전의 일이다. 항상 24시간 근무를 하고 난 뒤 퇴근하면 집에 와서 1~2시간은 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버티다 오후 4~5시 정도가 되면 다크서클은 코 밑까지 내려와 있고 괜히 가족에게 전투적인 아빠, 남편이 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근무 다음날엔 오전 중에 자려고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오전에 아이 둘을 보느라 잠잘 시간이 나질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아이들 점심까지 해결하고 겨우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나 : (잠에 취한 채) 여보세요?

동생 : 어, 형 주무세요? 제가 이따 전화할게요.

나 : 어, 알았다 (전화 끊음)  

   

그런데 전화를 하는 동생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냥 안부전화가 아니라 무슨 볼 일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찜찜함보다는 당장의 잠이 우선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전화해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다시 꿈나라로 갔다. 1시간이 지나 듣게 된 동생의 속사정은 충격이었다.      


동생 : 형, 실은 이번에 걸린 음주운전 1호가 나야

나 : 뭐라고, 어쩌다?(평소 예의 바르고 성실한 동생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동생 : 실은 그날 친구들끼리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거든요. 기분 좋게 부부 동반 식사를 하며 술을 마셨어요. 그 뒤 예약해 놓은 숙소로 갈 때 대리운전을 불렀어요. 그런데 운전하는 대리기사가 좀 이상한 거야. 내 차 아무 이상도 없는데 괜히 엑셀레이터가 이상하다 그러면서 10분이면 갈 거리를 20분 정도 걸려서 가더라고요.

나 : 그래서?

동생 :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뒤에 곤히 자고 있어서 웬만하면 깨우지 말자 싶었어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불평 안 하고 운전하는 대리기사 비위를 맞춰줬지 뭐, 그런데 그 대리기사가 또 뭐라고 하는 거야,

나 : 뭐라고 했는데?

동생 : 목적지에 다 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대리운전비를 달라고 하더라고... 괜히 싸우기 싫어서 원하는 대로 입금했지, 막 숙소 주차장이 5m쯤 남았을 때쯤 입금했는데 대리기사가 입금된 거 확인하더니 바로 차를 세우더라고요, 그리고는 숙소에 제대로 주차하지도 않고 그냥 내려서 가버리는 거야. 내가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휙 가버리더라고. , 우리 음주 운전하지 말라고 교육 많이 받았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제가 운전 안 하고 앞에 있는 숙소에 가서 발레파킹을 부탁했어요. 그런데 근무하는 사람이 1명인데 너무 바빠서 도저히 짬이 안 난다고 하는 거야, 20분을 넘게 기다렸어요... 계속 기다리다 보니까 내가 갑자기 판단을 잘못 했나봐요.. 5m밖에 안되니 그냥 운전해서 주차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드는 거야, 숙소에 주차하니 어떻게 알고 경찰이 오더라구요...

나 : 어, 그럼 그 대리기사가 신고한 거 같은데... 이런 나쁜 XX

동생 : 뭐, 술 먹고 운전한 제 잘못이죠... 형 그래서 말인데요..

나 : 어,, 말해, 돈이 없어서 돈은 못 도와주고... (웃음) 다른 건 다 해줄게

동생 : (웃으며) 아뇨.. 다 알죠. 징계 문제 때문에 변호사 선임했는데 탄원서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나 : 어.. 바로 보내라, 열 장이라도 써주마.     


그렇게 친한 동생과의 통화는 끝이 났다. 참고로 내가 아는 그 동생은 정말 선량한 시민이다. 남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다. 오히려 돈을 써서 돕는 애다. 그런데 몰지각한 대리기사의 치기 어린 신고로 동생은 음주운전자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어떻게 한쪽 편의 얘기만 듣고 이런 말을 하냐고 의견을 내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3년 넘게 봐온 동생을 믿는다. 아래 내용은 내가 탄원서에 썼던 글을 복사해서 올린 것이다. 동생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는 거라 생각해서 올린다.     


탄 원 내 용

저는 14년 차 소방관인 000입니다. 당사자와는 2019년부터 3년간 같은 센터에서 근무한 사이입니다.     

 

제가 본 당사자는 맡은 업무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민원인의 간단한 문의 전화에도 관련 사항을 샅샅이 훑어본 후 안내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5톤 펌프차의 운전원으로 일할 때는 해당 차량 매뉴얼을 10여 회 이상 숙독하며 화재 출동 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차량 조작법을 수도 없이 연습했습니다.     

 

소방관인 우리는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합니다. 10년 넘게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당사자만큼 성실하게, 남들이 봐도 엄청나다고 할 정도의 고강도 훈련을 계속해온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남들이 1시간 30분 걸릴 등산코스를 40분 만에 완주하거나  10 ~ 20km 이상 달리기, 1시간 이상의 근력운동을 거르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24시간을 연속해서 근무하는 날, 새벽 5시에 혼자 트레드밀 위에서 15km의 속도로 20분 넘게 달리던 당사자(보통 사람은 2분도 달리기 어려움)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제가 인정하는 자기 관리 끝판왕 중 1명이자 배울 점이 많은 동생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3년 동안 술 관련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성실하고 누구나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동료였습니다. 선처 부탁드립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탄원서를 썼다. 동생을 위로하면서 대리기사 원망하지 말라고 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화가 난다. 그 예의 바른 아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대리운전비 다 받아가면서 마지막엔 이자로 경찰에 신고했는지 자초지종을 듣고 싶다. 그 사람은 그 신고가 단순히 기분풀기용일지 몰라도 당하는 동생은 금전적인 손해에 신분상 불이익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음주운전을 한 동생의 잘못이지만 음주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차에서 내린 후 경찰에 신고를 한 그 대리기사의 잘못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대리기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쓴 나로 인해 그 사람의 기분풀기용 신고가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래서 또 하나의 억울한 음주운전자가 생기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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