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11. 3. ~ 2000. 3. 2까지 총 28개월 동안 해양경찰로 군생활하면서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다. 정말 죽거나 크게 다칠뻔한 위기다. 모두 경비함을 타면서 벌어졌던 일이다. 배를 타면, 특히 경비함 같은 경우는 다치기 쉬운 상황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다치지 않으려면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야 하고 그걸 위해 군기를 잡으려고 선임들이 수시로 후임을 때리는 문화가 생겼다. 같이 근무하는 경찰(순경~경감)은 이를 묵인하거나 심한 경우만 말리는 정도였다. 가끔씩은 후임들 군기가 빠졌다며 구타나 기합을 종용하기도 했다.
위험한 상황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대표적인 사고로 예를 들자면 경비함이 기관(엔진)이 고장 난 어선을 끌고 오다 어선과 경비함을 연결한 와이어(철사를 꼬아 만든 줄, 엄청 튼튼하나 와이어 굵기에 따라 인장력-물체를 늘어뜨리거나 잡아당기는 힘-이 다름)나 홋줄(배를 묶을 때 쓰는 굵은 줄)이 끊어졌고 그 와이어나 홋줄에 맞아 죽거나 몸이 양분되는 사고도 있었다. 그보다 덜한 경우로는 경비함과 어선 사이에 다리가 끼어 절단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중 내가 겪었던 아찔한 위기를 써본다.
각종 펜더의 모습
1. 배와 경비함 사이에 머리가 끼일 뻔했던 일
시기 : 1998년 6월 ~8월 사이로 추정
장소 : 제주도 남서쪽 해상(육지와 약 30km 떨어진 동중국해 어느 지점)
소속 : 제주해경 000함(지금은 제주도엔 해양경찰서가 2곳이지만 98년엔 제주시 건입동에 한 곳뿐이었음)
당시 상황
해양경찰의 주요 업무 중 하나인 어선 검문검색을 하는 중이었다. 그때 내 역할은 경비함 좌현 중간쯤에서 경비함과 어선 사이의 공간에 펜더(배와 육지 또는 배와 배 사이의 완충 작용을 하는 고무의 일종)를 들고 배가 부딪히는 걸 막고 있었다. 보통 배의 크기가 엇비슷하면 바다가 요동치지 않는 한 다칠 위험이 없는 업무였다. 하지만 경비함과 검문 중인 어선의 크기는 서로 달랐고 마침 파도도 거센 편이었다. 그럴 경우 경비함보다 가벼운 어선이 파도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인다. 바다에 떠 있으니 파도가 칠 때마다 움직이는 배 사이를 조그만 펜더 여러 개로 막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에 따라 부딪히지 않도록 펜더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해야 한다. 간혹 펜더를 들고 있을 때 배의 움직임을 놓치는 경우 배끼리 부딪힐뿐더러 이때 손을 다치거나 펜더를 묶은 줄이 끊어져 펜더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내가 다칠 뻔한 경우 역시 위와 같았다. 다만 파도에 따라 어선이 급격하게 움직였고 야구의 불규칙 바운드처럼 갑자기 어선이 내 키만큼 솟구쳤을 때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난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이 굳어 버렸다. 그런데 그때 다른 경찰(아직 현역으로 근무 중이며 50대 후반 문무를 겸비한 분, 나중엔 친해져서 삼촌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연락 중)의 말을 듣고 나서야 몸이 움직였다.
삼촌 : 엎드려
나 : (들고 있던 펜더를 놔둔 채 바로 그 자리에 엎드림)
내가 엎드리자마자 높이 떠오른 어선은 경비함의 좌현에 “쾅”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혔다. 딱 내 머리가 있던 높이에 부딪혔더랬다. 이건 펜더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다. 바로 피했어야 했다. 만약 삼촌의 “엎드려”라는 외침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난 어선과 경비함 사이에 머리가 끼인 채 죽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황급히 엎드렸다 안도하며 일어나는 날 보며 삼촌은 씩 웃었다. “짜식, 삼촌이 너 살렸다, 너 방금 죽을 뻔했어, 인마”. 함교(배의 최상층에 있으며 배의 조종실이라고 생각하면 됨)에서 검문검색을 지휘하던 함장이 “쾅”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삼촌이 서둘러 이상없음을 보고했다(당시 삼촌은 경장, 함장은 경감 그러나 나이는 7살 차이, 함장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시험으로 빨리 진급한 경우, 나처럼 군복무로 해양경찰에 들어와 제대한 후 순경부터 시작해서 경감까지 진급함, 나중엔 총경으로 해양경찰서장까지 했음, 직원들을 정말 귀찮게 하는 스타일이며 권위의식이 엄청남, 본인 결재 없이는 어떤 일도 진행하지 못하게 하는 스타일, 그러나 조함술은 형편없었음). 사고가 없는 걸 확인한 함장은 괜히 겸연쩍었는지 가만히 있는 날 걸고 넘어졌다.
함장 : 000, 똑바로 해
나 : 네, 알겠습니다.
뭘 똑바로 해? 삼촌 아니었으면 이미 난 저 세상 사람이구만! 그 상황에 똑바로 하라니 참 함장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분이었다. 야구선수가 야구공이 불규칙 바운드가 될지 어찌 아나?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있던 어선이 그렇게 순식간에 튀어 올라 부딪힐지 아무도 몰랐다. 정말 운이 좋았다는 표현 아니면 부모님이 열심히 기도해 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2. 손에 던짐줄이 끼어 잘릴 뻔함
시기 : 1998년 5월 초로 추정
장소 : 제주도 남서쪽 해상(육지와 약 30km 떨어진 동중국해 어느 지점)
소속 : 제주해경 000함(지금은 제주도엔 해양경찰서가 2곳이지만 98년엔 제주시 건입동에 한 곳뿐이었음)
당시 상황
예인업무를 종종 했었다. 엔진이 고장 난 어선들이 제주도에서 100~150km 떨어진 거리에서 조난 신청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조난신고를 받고 출발하는 그 시간부터 어선을 끌고 항구로 되돌아 올 때까지 경비함의 승조원들은 시간당 800원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같이 배를 탔던 분의 말로는 어선이 실제로 고장 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물고기가 잘 잡히니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실컷 조업을 마친 다음 항구로 돌아오기 위해 조난 요청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그게 조업을 중단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곁들었다.
선박 예인 업무는 날씨가 좋을 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날씨가 지독히도 나쁜 날에 고장 난 어선과 마주쳤을 때다. 어선 쪽에선 서둘러 구해주길 바라지만 높은 파도로 인해 어선 쪽으로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적어도 10m 안으로 거리가 가까워져야 어선을 끌 예인색(홋줄)을 연결할 히빙라인(던짐줄)을 던지는데 날이 나쁘면 던짐줄도 멀리 나가지 못할뿐더러 갑판에 서 있는 것 조차 힘들 때가 많았다. 5차례 이상 던짐줄을 던져봤지만 빗나가거나 중간에 떨어지는 등 작업 속도가 영 나지 않았다. 어선과의 거리를 줄이는 게 무리라고 판단한 갑판장님(해군 상사로 제대한 후 다시 해양경찰로 들어온 유능한 인재였음, 갑판장은 해군이나 해경에서 쓰는 보직 중의 하나로 기관장, 갑판장, 통신장 등이 있음)님은 차라리 경비함과 어선의 거리에 여유를 둔 채 인력으로 던지는 히빙라인 대신 히빙라인 발사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발사기에 연결할 던짐줄을 바람에 날리지 않게 꼭 붙들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나였다. 던짐줄은 네모난 박스에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갑판장님은 그 박스에서 줄 끝부분을 잡어 발사기에 매달고선 내게 “잘 잡고 있어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예인업무를 처음 해본 나로선 그 지시가 정말 무겁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던짐줄이 들어있는 이 상자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갑판장님이 발사기를 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발사기가 순식간에 건너편의 어선으로 날아가는 사이 발사기와 연결된 던짐줄이 빠른 속도로 박스 안에서 풀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고 던짐줄이 튀어 나가며 내 손바닥과 부딪혔는데 마치 매로 손바닥을 맞는 것보다 더 아팠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손을 치웠지만 이미 던짐줄은 내 손바닥을 때리고 다 풀려나간 뒤였다. 그래도 발사기를 이용한 연결작업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나중에서야 줄이 튀어 놀랐단 말을 들은 갑판장님은 “우리 00이, 하마터면 손가락 날릴 뻔 했다이, 아까는 너한테 조심하라는 말도 몬 했다. 미안하데이”라며 사과하셨다. 알고 보니 그 던짐줄에 손가락이 걸렸으면 던짐줄 발사 실패는 물론이고 손가락이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던짐줄 날아가는 과정에 그리 큰 위험이 내포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해 전에도 해군 청해부대 입항 시 홋줄이 끊어지면서 1명이 순직한 사고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군대에선 여러 가지 위험한 일들이 널려 있고 누군가는 그 사고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25년 전, 나 역시 운명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내가 사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무사히 제대하게끔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