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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l 27. 2023

이런 것까지 출동해야 하나?

어이없는 출동 요청

약 1달 전쯤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출동 요청이 있었다. 아래는 출동을 요청한 민원인과의 대화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이다.     


나 : 감사합니다. 00 센터 소방장 000입니다.


민원인 : (가끔 이런 전화가 오는데 꼭 119로 신고하지 않고 해당지역을 관할하는 안전센터를 검색 후 안전센터로 직접 전화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럴 경우 민원인과 통화가 끝난 다음 다시 상황실로 전화해서 재난 출동임을 알려야 합니다. 현재 출동 체계는 상황실에서 출동 지령을 내려야 재난 일련번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매 출동 건마다 고유번호가 부여되고 그 후에 출동차량, 조치내역 등 각종 기록이 생성됩니다) 자전거 자물쇠가 고장 나서요, 여기는 00동 어디 근처인데요, 이거 해제 가능할까요?(이게 출동을 요청할 사안인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 : 선생님, 저희가 전화 주신 분이 자전거 주인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남의 자전거 자물쇠를 잘라달라는 분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솔직하게 말하자면 급하지 않은 문 개방이나 자물쇠 해제를 요청하는 경우 출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면 또 불친절하다는 식의 민원을 제기하니 최대한 돌려서 부드럽게 얘기합니다, 민원인이 자전거를 가지고 센터로 방문하는 경우 주인 여부를 확인 후에 자물쇠를 잘라준 경우도 많습니다)


민원인 : 제가 주인 맞고요, 자전거에 제가 사는 아파트 동호수가 표시된 스티커가 붙어 있어요. 이 정도면 괜찮나요?


나 : 그렇다면 저희가 출동 대기중이라 그쪽으로 갈 수는 없구요, 저희 센터로 오셔야 합니다. 주소는 000입니다. 여기로 오실 때 주소가 나와 있는 선생님 신분증이 필요합니다.


민원인 : 신분증은 없고 사진 찍어놓은 것만 있는데 그걸로 안될까요?


나 : 안됩니다. 포토샵으로 충분히 위조할 수 있어서, 꼭 신분증을 확인해야 합니다.


민원인 : (갑자기 짜증냄, 이때부터 반말이 섞여서 나옴) 아, 진짜 별 걸 다 트집 잡네. 아, 그럼 내가 집에 가서 직접 신분증 가져오면 되잖아, 그런데 이쪽으로 출동 요청하면 오는 거예요?


나 : 일단 자전거 끌고 저희 센터로 오신 후 주인 여부가 확인되면 저희가 절단기로 자물쇠를 자를 수는 있습니다. 선생님 계신 곳으로 저희 차를 가지고 출동할지 여부는... 글쎄요? 어렵지 싶은데요(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짜증내거나 화내는 사람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돌려 말함)


민원인 : 아, 나 진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거 사람이 좋게 얘기하면... 이러니까 공무원이 문제라고 하지. 아까부터 계속 안된다고만 하고, 살살 사람 달래 가며 뭔 소릴하는거야? 이런 대접받으려고 내가 세금 냈나? 당신 이름 뭐야, 계급은 뭐야?


나 : (화났으나 꾹 참음, 이를 악물며) 소방장 0 0 0입니다.(일부러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얘기함)


민원인 : (이때부터 약 5분 넘게 열변을 토함.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공무원이 불친절하다, 왜 안된다고만 하냐? 등 했던 말 반복) ABCDEFGJIJKLM.....


나 : (계속 참음, 정말 내가 공무원만 아니었으면.... 하지만 나 역시 원칙말고는 할 말이 없음) 조금 전 말씀드린 대로 신분증이랑 자전거 갖고 오시면 확인 후에 자물쇠 해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출동 여부는 119 전화하셔서 얘기해 보세요(일부러 통화내역이 녹음되는 상황실로 전화하도록 유도함, 출동 안 시켰다는 민원을 넣을 것 같았음, 아래 4번에 해당되어 출동하지 않을 확률 100%).


출동을 거절할 수 있는 법령


민원인 : 소방장 000, 알았어, 갈 테니까 기다려


나 : 네, 오세요


내가 자물쇠를 잘라낼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은 자전거 주인이 직접 자전거를 가지고 오면 주인임을 확인 후 소방관인 우리가 그 정도는 충분히 대민서비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출동대기하고 있는 장소인 센터로 오셔야 하고 민원인이 요청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다른 출동이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 정도는 우리도 웃으며 충분히 봉사할 수 있다.      


만약 내 친구나 지인들이 이런 어이없는 요청을 하려 한다면 두고두고 말렸을 것이다. 민원인 소유의 자전거 자물쇠를 잘라야 하는 게 소방관이 해야하는 일인가? 그게 출동을 요청할 정도로 긴급한 사안인가? 이게 그렇게 판단이 안 서는 일인가? 보통 그런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지, 굳이 소방서에까지 전화하지 않는다.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하지, 민원인 듣기 좋으라고 된다는 대답을 해야 하나?       


절단기


이후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10여분이 지나 내게 짜증을 잔뜩 쏟아냈던 민원인이 툴툴거리며 센터로 자전거를 끌고 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물쇠를 자를 수 있는 장비(절단기)가 실려 있은 5톤 펌프차는 민원인이 도착하기 5분 전에 차대차 교통사고 구조출동을 나갔고 별 수 없이 민원인은 투덜대며 자전거를 끌고 되돌아갔습니다(절단기는 보통 주력으로 운용하는 5톤 펌프차에만 있습니다). 어이없는 출동 요청은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이상한 요청이 사라질까? 이럴 때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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