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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23화. 아무리 일해도 존재감 없는 나

by 회색토끼

본 에세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로 등장하는 모든 이름(기관명, 지명, 인물명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정보 및 민감정보 외에는 모두 실화입니다. 퇴사를 꿈꾸지만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기관장님을, 저의 모든 동료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두근두근 첫 국정감사 시즌. 교육부의 감사일정에 맞춰 전원이 대기했다. 과연 호텔에 투숙하면서 요구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어떤 기분 일까도 궁금했는데 나는 교묘하게 배제되었다.


“알다시피 예산이… 한정적이란 말이지. 고참이랑 팀서무만 호텔로 가고 나머지는 집에서 대기해!”


팀장님은 호쾌하게 교통정리를 했다. 호텔 투숙에 당첨된 이들은 슬퍼하기보다는 행복해 보였다.


“수달쓰~ 우리 야식으로 뭐 시켜 먹을까?”

“어차피 우리한테 갑자기 뭐 요구하진 않겠지.”

“아, MT 가는 기분이야. 신난다!”


집에서 대기하는 조에 걸린 나는 또다시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그저 약간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 그래서 회심의 일격을 날려보았다.


“저도 제 돈 내고 같이 묵을까요?”


그러자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버렸다.


“구… 굳이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은데.”


최노루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말렸고 나도 눈치껏 거기서 더 주장하진 않았다.


국정감사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건 없었다. 아마 우리 부서에 그 해에 문제가 될 만한 이슈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일이 없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꽤 큰 성과였다.


우리는 낡은 TV를 틀어놓고 하루 종일 ‘복지’라는 단어가 나오나 안 나오나 귀를 쫑긋하고 대기했다.

정말 무한정으로 대기했다. 거의 밤 12시까지. 잠깐씩 ‘복지’ 어쩌고 할 때마다 팀장님, 주무님 등 싹 다 TV 앞으로 모여 청각테스트를 하듯 귀를 갖다 대었다. 모두 맥거핀으로 끝나버렸지만.


“오늘 하루 다들 고생했고. 지정된 사람들 외에는 집에서 대기! 카톡 수시로 보고 있어!”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차로 집에 왔고, 집에 와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계속해서 카톡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별다른 공지사항은 없고 자기네들끼리 야식 먹으며 노트북을 켜고 앉아있는 단체 사진 몇 장이 올라왔다.


“… 이게 무슨 대기야. 그냥 놀러 간 거네.”


나는 조용히 투덜거렸다. 새벽 4시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 급박한 요구자료의 희생자는 아니었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무탈히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행정감사도 국정감사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그 일정만 사흘남짓 길어졌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이 때는 호텔 투숙 같은 일정도 빠져있었다. 예산이 부족하기도 한 데다가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대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지만 행정감사도 별일 없이 끝났다.


하반기 빅 이벤트인 감사 시즌이 끝나자 지원청에서도 시끌시끌했었던 ‘표창 시즌’이 돌아왔다.


본청에 있으니 장관 표창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때문에 다들 그보다 아래 급인 교육감 표창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이미 지원청에 있을 때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우리 이번에… 장관 표창 누구로 하지? 노루가 작년에 받았지?”

“네, 팀장님.”


그렇게 계산하다 보니 남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일한 지 6개월 만에 장관표창까지 받을 수 있다니 나는 속으로 신이 났다.


“… 저……그럼 제가 받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되지. 우리 팀 전통상 그 자리에서 1년 이상 일해야 장관 표창 줘. 토끼는 6개월밖에 안 됐잖아?”


그렇게 학교까지 공문을 뿌려 추천 명단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나는 아까운 마음에 쯧, 혀를 찼다.


본청에 있으니 표창은 더더욱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고 그 뒤로 난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나 표창 대상자 명단 공문을 확인했을 때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장관 표창 대상자 명단》

교육복지 분야 교육복지팀 박수달



‘왜… 박수달이……?’


그녀의 메인 업무는 팀서무인 데다가 사업의 일부 꼭지만을 담당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나처럼 1년 근속 근무도 아니었는데. 왜 그녀만 다른 기준이 적용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차마 따지진 못하고 나는 애써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수달쌤! 장관 표창받으셨네요! 축하드려요!”

“하하. 저도 받을 줄 몰랐는데, 고마워요.”


그녀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으며 열심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모니터에는 일하는 화면보다는 메신저 창 수십 개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화면 속 대화에는 언제나 내가 없었다.


나는 씁쓸한 마음에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에 몰두했다. 마음 한 구석 불손한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다.


‘이게… 다 무슨 의미지?’


여기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어떤 공적을 세워도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나에게 공적을 세울 만한 일이 배정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본청에서 다들 밤늦게까지 거의 매일 야근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유독 나만 유연 근무 시간을 지켜가며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게는 어렵고 도전적인 일이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침을 작성하는 것도 작년 것 그대로 답습하면 그만이었고 어떤 새로운 정책을 만들 일도, 주체적으로 나서야 할 일도 없었다.


“난…어느 기관에서 일해야 맞는 걸까, 대체.”


어쩌다 보니 엘리트코스로 최상위기관에까지 흘러들어온 나. 처음 입직했을 때의 찬란함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조용히 대학시절 가입했었던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공무원인 30대 여자가 이직할 만한 기업은 없었다. 왜냐? 나에게는 학점도, 스펙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공무원 합격증서 하나뿐. 알 수 없는 우울감이 혀끝에 느른하게 맴돌았다.





그럼에도 난 버텼다. 일단 휴직을 해볼까 했지만 내가 쓸만한 종류의 휴직이 없었다. 가장 만만한 게 질병휴직이었지만 자존심상 정신과에 가서 우울증 진단서를 끊어와 본청에서 나가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예전에 학교에서 같이 일했던 실장님 결혼을 하게 된다면 꼭 본청에 있을 때 하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참고 또 참았다.


팀원들과 팀장님께 청첩장을 수줍게 돌리고 결혼식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신혼여행으로 2주 동안의 특별휴가 복무를 상신해 버린 것이다. 본청 근무자로서는 파격적인 기간이었지만 일단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빨리 흘러가게 하고 싶었다.


“쌤, 내일이 디데인데 어떡해요. 이거 다 미리 하고 가셔야 해서….”


하필 추가경정예산 시즌과 나의 신혼여행 기간이 딱 겹쳐버렸다. 결혼식 날짜를 잡을 때도 1년의 스케줄을 다 고려하여 가장 아무 일도 없고 한가한 달을 고르고 골라 정했던 것이었지만 내가 예상할 수 없었던 변수였다.


덕분에 나는 제출해야 할 필수 자료들을 미리 작성해야 하느라 오랜만에 야근을 하게 되었다. 예산 변경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림잡아봐도 본예산 때 잡아 놓은 예산이 너무 많이 남을 것이 확정적이라 감액을 해야만 했다.


“수달 쌤, 내일 봐요. 제 분량은 프로그램에 다 저장해 놨어요.”

“아아…쌤. 근데 어쩌죠. 내일… 할머니 댁에 가야 할 것 같아서 결혼식엔 못 갈 거 같아요. 진짜 미안해요!”


거짓말.

그녀에게 내 결혼식 날짜를 1년 전부터 말해줬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그녀였다. 그녀를 위한 자리도 VIP로 따로 마련해 두겠다고 농담 식으로 말하기도 했었다. 갑자기 가족 일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결혼식 당일에도 팀원들 중 절반 정도만 인사치레로 식 시작 전 신부 대기실만 들르고 바쁘다며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최노루의 결혼식 땐 팀 전원이 참석하여 식을 끝까지 다 본 데다가 식사까지 다 하고 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행복해야 하는 날인데. 이 알 수 없는… 공허함은 뭐지. 내가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게 아닐까.’


정신없이 식순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잠식하여 떠나질 않았다.


푹 쉬려고 기획했던 신혼여행도 제대로 망가졌다. 박수달은 시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카톡과 보이스톡을 걸어왔던 것이다.



박수달: 쌤…이거 계산식이 조금 틀린 것 같대요.

박수달: 선생님… 급하게 이거 하나만 더요 ㅠㅠ

박수달: 쌤…미안한데……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을 켜는 것이 일상이었고 급기야 독수리는 3일 차쯤 되었을 때 나에게 화를 내었다.


“넌… 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 나도 직장을 다니지만 신혼여행 때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고.”

“…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난 다 해놓고 왔는데 왜 계속 수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참나…. 나 혼자 이 동네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빨리 끝내.”


독수리는 차갑게 나가버렸고, 나는 느린 와이파이에 기대어 자료를 메일로 송신했다. 마지막 엔터를 누르는데, 눈물이 한 방울 톡 흘렀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지? 내 생활은… 왜 하나도 없는 거냐고….”


다음 정기 인사 시즌에 난 반드시 떠나리라 결심했다. 이 지긋지긋한 기관에서 나갈 것이다.


“하.....”


어떤 꿈과 희망을 안고 왔었던 것 같은데, 텅 비어 메말라버린, 기계적인 나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Behind the Scene]

1. 이제 김토끼 시리즈도 단 1화만이 남겨놓고 있습니다. 신의 직장이라 일컬어지는, 남들이 보기엔 놀고먹고 땡 하는 공노비의 삶을 일부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재밌으셨는지 모르겠어요. 모 작가님께서 말씀하셨듯... 본청에서는 너무 누군가로 특정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가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정책 이야기도 할 게 많지만 정치적으로 문제 될 수도 있을 듯하여 자세히 서술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빨리 끝을 보고싶어.. 화요일에 보자고 말씀드렸는데 월요일에 찾아갈 예정입니다.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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