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화. 나는 찬란했고, 찬란하며, 찬란할 것이다
본 에세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로 등장하는 모든 이름(기관명, 지명, 인물명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정보 및 민감정보 외에는 모두 실화입니다. 퇴사를 꿈꾸지만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기관장님을, 저의 모든 동료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기 전보 시즌이 돌아왔다. 나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 기관을 떠나리라. 마땅히 갈 곳은 없고 다시 학교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봐야겠다고 결정했다.
“토끼, 이번에 나갈 거야?”
팀장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무조건 나가요.”
“나랑 6개월만 더 있으면 어때? 원하는 대로 보내줄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원하는 대로 가는 인사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 인생 계획이 있어서요. 어쩔 수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도 더는 설득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혼여행 이후 나는 이유 없이 앓기 시작했다. 몸은 야위고 얼굴은 해쓱해졌다. 이상하게도 몸살이 가시질 않았다.
심지어 하루는 팀장님이 이렇게 물어봤을 정도였다.
“토끼…. 혹시 임신했어?”
“제가요…? 전혀 아닌데요.”
“낯빛이… 안 좋은 게 왠지 그런 것 같아서.”
당시에는 신혼 생활을 1년쯤은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었기에 그냥 그 공간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나 자신은 깎여 나갔던 것일 뿐 임신은 나와 아주 먼 이야기였다.
아마 나는 우울증 직전이었을 테지만, 독수리가 있었기 때문에 우울증까지 발전하진 못했을 것이다. 집에 와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취미활동을 같이 하다 보면 직장에 대한 생각이, 자괴감이 살짝은 옅어졌기 때문이다.
“밑져야 본전. 될 대로 되어라.”
나는 아무런 끄나풀도 없으면서 조용히 집 근처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를 1 지망으로 썼다. 박수달은 하하호호 패거리들과 함께 어디를 지망할지 즐겁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도 유예하거나 다른 과로 가지 않고 본청을 떠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이후 나는 그녀와 사적인 대화는 일절 하지 않으며 공적인 대화만 짧게 하였다.
인사조서를 제출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김토끼 선생님, 혹시 ♡♡학교로 가시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른 곳도 아니고 ♡♡학교는 학생수가 1,000명 이상이라 일도 많고 학부모 민원도 강성인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는 나에게 세입 자리라고 설명했지만 난 그런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싫어요. 전 제가 1 지망으로 쓴 데 무조건 가고 싶어요.”
-그렇게 확고하시다면. 알겠어요. 그럼 힘써볼게요.
전화는 짧게 끝났다.
‘나랑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뭔…. 적어도 그 학교론 안 보내겠군.’
과연 나는 어디로 보내질까.
인사 발표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공문을 열람했다.
“…세, 세상에!”
그 인사 담당자의 말처럼 내가 1 지망으로 쓴 곳이 되었다. 나는 얼른 박수달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교육복지팀 박수달 → ♡♡학교
악명 높은 학교는 괴이하게도 박수달이 가게 되었다. 나는 혹시 그녀가 지망한 것인가 눈치를 살폈다.
“흑흑…. 나 어떡해. 나 ♡♡학교래. 여기서 어떻게 버텨.”
“거기… 엄청 빡센 데잖아. 어쩌다 거기로 튕겼대?”
그녀를 비호하는 무리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고 위로했다. 나는 묵묵히 창을 닫고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내게로 몰려왔다. 오랜만의 관심표명이었다.
“토끼쌤~ 쌤 어디로 발령 났어?”
“아… 저는 ○○학교요.”
“에!? 거기 1 지망으로 쓴 데 아냐? 집에서 10분 거리라던?”
“맞아요.”
“어떻게 딱 1 지망으로 발령이 나? 뭐 인맥이라도 있었어?”
“글쎄요…. 저 그런 거 딱히 없는데.”
그들은 호들갑을 떨며 수군거렸다. 박수달은 눈물을 훔치며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그 뒤를 여러 무리들이 도미노처럼 따랐다.
나는 교육청을 떠나는 날까지 어떤 술수를 써서 나에게 유리한 곳으로 발령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딱히 아무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박수달에게 아주 작은 복수가 된 듯하여 여기 온 이래로 아주 조금 기뻤다.
돌고 돌아 처음 발령이 났을 때처럼 학교로 돌아왔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낯설었다. 업무도 자잘하고 쉽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낡은 컴퓨터처럼 버벅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청에선 감사 시즌 외엔 야근한 적이 없었는데 학교에선 오자마자 10시간 이상 초과 근무를 해야만 했다.
“왜… 이렇게 학교에서 일하기 힘들어졌지?”
정말로 이제는 쉬고 싶었다. 나에게 쉴 수 있는 카드는 육아 휴직뿐이었지만 임신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하늘이 점지해야 가능한 일이지 않던가.
“……!?”
발령받고 2개월쯤 됐을 무렵이었다. 나는 뜻밖에도 임신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임신 준비 전까지 죽도록 마시자는 취지에서 열심히 남편과 밤마다 술을 마셨는데… 임신이었다. 마치 사고 치듯이. 아이가 이미 자궁에서부터 술에 절여진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야, 토끼쌤! 축하해! 우리 학교 터가 좋거든. 임신해서 나가는 선생님들이 엄청 많았어!”
나를 유달리 좋아하시던 교장선생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축하해 주셨다.
마침 집이랑도 가깝고 그땐 점점 일이 숙달되어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적어도 만삭 직전까지는 다녀볼 요량이었다.
안타깝게도 실장님은 나의 임신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이미 행정실의 절반의 인원이 어린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었기에 육아 시간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까지 모성보호시간을 쓰면 행정실에 사람이 너무 없다는 이유로 그는 마음에 안 들어했다. 그때부터 그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나에게 트집을 잡으며 막말을 시전 했다.
“품의 다시 올려. 근거가 마음에 안 들어.”
“왜 내가 지시한 업체에서 안 했어?”
‘그건 부산에 있는 업체라고요…. 같은 물건을 서울에 있는 업체에서도 파는데 굳이 왜요….’
나는 그가 쓸데없는 걸로 트집을 잡고 반려하더라도 참고 견뎠다. 그동안 굴러온 경험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적어도 그는 의자를 던지거나 욕을 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한 말은 내 모든 걸 내려놓게 만들었다.
“토끼쌤. 이제 임신해서 살찌면 남편이 토끼쌤 멀리하게 될지도 몰라. 조심해.”
“아하하… 그럴까요?”
그 자리에서는 대충 웃으면서 넘겼지만 그날 회식 끝나고 나서 펑펑 울었다. 안 그래도 임신하면서 점점 변하는 나의 몸이 두려웠다. 극악의 입덧을 견디면서 일하는 게 쉽지 않았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혼자 몇 분간 앉아 참아왔던 구역질을 쏟아내곤 했다.
“꾸에에엑…. 헉헉, 죽을 것 같아….”
핸들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구역질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근무시간에는 화장실 대신 학교 건물 뒤편에서 한참을 쪼그려 앉아 구역감을 가라앉히곤 했다.
괴로운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그런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견디며 일하고 싶지 않았다.
“… 저 그냥 다음 달부터 휴직할게요. 죄송해요.”
계획에도 없던 산전 육아휴직을, 실장에게 복수하듯 선언했다.
“……어어… 그래, 알겠어.”
다른 동료 선생님들은 실장님의 만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휴직 선언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워할 뿐.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행정실의 모든 멤버들이 다 합이 잘 맞고 좋았었던 참이었다.
마지막 출근날까지 나는 내 몫의 지출증빙서를 다 묶고 선생님들의 구매 요청 내역을 리얼 타임으로 빠르게 수행했다.
“이제 좀 익숙해졌는데… 막상 떠나려니까 아쉽기도 하고.”
근무했던 기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나의 짐도 얼마 되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선생님들은 중간에 꼭 놀러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빠짐없이 자그마한 이별 선물을 돌렸다. 원래 내가 좋아했던 일, 대가 없이 선의로 선물을 주는 일. 모두 좋아해 주었다. 이런 걸 왜 주냐고 따져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들은 내가 떠나는 걸 더욱 아쉬워했다.
“…쌤, 조심히 가요. 임산부는 무거운 거 들면 안 돼.”
“감사합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작은 상자에 내 물건을 담아 학교에서 빠져나왔다. 행정실 선생님들이 십시일반 같이 나와서 나의 짐을 들어주었다. 실장님만은 나와보지 않았다.
그들은 짐을 차에 실어주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며 시동을 걸었다. 막상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이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몰라.”
늘 불만처럼 면직하고 싶다고 말하던 나.
10년만 채우고 그만둘 거라고 노래 부르던 나. 그럼에도 정작 그만둘 용기는 사실 없었다.
우연히 나에게 찾아온 요정은 내 뱃속에 심어진 기회의 별 같았다. 덕분에 떠나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공무원으로서의 커리어는 이대로 중단되면서 실패한 걸까. 애초에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던 내가 잘못한 걸까.
신호를 기다리면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구름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흐드러졌다.
아니다. 공무원 김토끼는 찬란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설령 그것이 공직이 아니더라도─ 시험에 합격하던 그날처럼 나는 더없이 찬란할 것이다.
-The End-
[Behind the Scene]
1. 2025년 5월에 연재를 시작하여 장장 5개월 만에 첫 브런치북 완결을 맞게 되었습니다. 첫 작품이었는데 과분한 사랑을 받았고 정말 좋은 작가님들을 글벗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화를 쓰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가 마지막 문단은 이미 오래전에 미리 작성해 두었었습니다. 찬란하다고 끝난 이유는 이 브런치북의 첫 화를 기억하시나요? 첫 문장이 “스물여섯의 나는 찬란했다.”였습니다. 그것과 수미상관으로 끝나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2. 이번이 정말 마지막 홍보입니다. 때마침 오늘이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 마지막 날입니다.
시간되시면..읽어봐주시옵소서. 바쁘면 별점이라도★
전체적으로 조회수가 고르면 출판사 컨택에 유리하다고 하더군요. 브런치 작가님들이 많이 지원사격해 주셔서 제가 아무것도 없는 무명의 지망생이었지만 꽤 앞페이지에서 존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