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베니스여행, 이것은 여행인가 고행인가

도시가 물에 잠겼다?!

by 회색토끼

Previously on Kimtoekki’s travel essay

예상 밖의 지연으로 밤 9시 넘어서 베니스에 도착한 토끼와 라니. 눈 앞에 펼쳐진 건 이미 물에 잠겨버린 도시 그 자체였는데….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몇 번이고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난생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다가 물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라 도로는 없고 오로지 물길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시간대도 칠흑같은 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겨있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우리가 예약한 숙소로 가는 길도 물에 잠겨 있었다.

즉, 물살을 헤치고, 아니, 수영을 해서라도 가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가 맞다면 말이다.


“이게…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도……모르겠어.”


우리는 일단 물에 잠기지 않은 길로만 간신히 걸어서 숙소 인근까지 왔다. 당시 산 마르코 광장은 아예 그냥 물 속에 잠긴 상태였다. 고로 광장에서 이어지는 골목길들 역시 물 속에 있었다. 우리가 약간의 물살만 헤칠 수 있다면, 다행히도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조금 고지대에 위치해있어서 물에 잠기지 않았었다.


“자자! 장화 한 짝에 40유로!”


때마침 흑인 남성이 비닐 장화를 팔고 있었다. 한국에서 딱봐도 1000원이면 살 정도의 비주얼이었는데 그걸 40유로에 올려치기해서 팔고 있었다. 장화라도 신어야 물살을 헤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의 깊이는 대략 우리의 허리선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각자 40유로씩 현금을 주고 비닐 핑크 장화를 샀다.

핑크장화 인증샷...이게 40유로?

이 장화는 너무 아까워서 고이 간직했다가 한국까지 가지고 갔다. 엄마는 그 장화를 보고 어찌나 웃어대던지.


“꼴좋다. 크크크. 이런 허접한 장화를 40유로에 산다고? 크크크크. 좋은 경험하고 왔네.”


그 뒤로 내가 여행을 갈 때마다 엄마는 날씨악마로 흑화한 나를 놀려댔다. 이번 여행에는 장화가 필요하지 않냐며. 혹시 모르니까 이 귀한 장화를 꼭 챙겨가라고. 이에 나는 또 혹해서…혹시나하여 장화를 챙기게 되었다.


우리가 신고 있던 신발을 캐리어에 대충 쑤셔넣고 둘 다 전투장화로 갈아 신었다. 프리사이즈여서 그런지 그럭저럭 잘 맞았다.

구글 지도를 통해 다시 한 번 길을 확인하고 우리는 물 속으로 과감히 몸을 던졌다. 양 손에는 캐리어를 번쩍 이고서.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데 이건 여행인지 고행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나 꿈꾸고, 가고 싶어하던 곳이었는데 나에게 이런 시련이나 주는 베니스가 미웠다.

물에서 나온 직후 숙소 앞에서 찰칵

다행히 우리는 최단 거리 지점부터 잠수(?)하여 걸었기 때문에 캐리어만큼은 지켰다. 바지고 뭐고 입고 있는 옷은 다 젖긴 했지만 다른 옷들은 구출해냈다. 호텔에 도착하자 직원들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우릴 바라봤다. 불쌍했는지 룸 업그레이드도 해줬다. 안락한 우리의 방을 확인하고나서 털썩 주저 앉았다. 어떻게든 도착을 했고, 체크인도 해냈다.


“……근데…배고파…….”

“맞아. 우리 저녁에 아무것도 못 먹었어.”


생각해보니 베니스에 도착 예정시간이 저녁 6시 30분 정도였고, 도착해서 우아하게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벌써 시간은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항공사 사정으로 인한 지연 때문에 우리는 무한 대기를 하며 뭘 먹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당장 공항에서 노숙해야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먹을 건 당연히 생각나지 않았다.


구글 지도를 켜서 이 늦은 시간에도 여는 가게가 있는지 확인했다. 운좋게도 숙소 바로 맞은 편에 피자가게가 오픈해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대충 젖은 옷만 갈아입고 헐레벌떡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고 직원 하나가 유유자적하게 빗자루로 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피자……포장해서 가려고 하는데 가능해요?”

“네네. 물론이에요. 잠시만요.”


나는 익숙하게 영어로 물었고, 카운터에 있는 여직원은 동양인이었는데 영어를 꽤 잘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니 근데, 어떻게 도시가 이렇게 물에 잠길 수가 있어요?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요.”


“아, 이건 아쿠아 알타 현상이라는 거예요. 매번 겪는 일이라 이렇게 어플로 수심 확인도 가능해요. 아마 내일 아침 쯤에는 산마크로 광장쪽부터 물이 쫙 빠질테니 걱정마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핸드폰으로 어플을 켜서 내게 보여주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쿠아 알타’라는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쿠아 알타?


이탈리아 어로 ‘높은 물’이라는 뜻.

겨울철 기류에 의해 도시가 물에 잠겨 생기는 역류 현상.


“하필 겨울에 와서……이런 일이. 저는 베니스 여행을 진짜 기대 많이 했는데, 망쳐서 슬퍼요.”


나는 슬픈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직원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여행을 왜 망쳤다는 거예요?”

“보다시피…쫄딱 젖었고……관광도 제대로 못하고….”

“도시가 물에 잠기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일 아닌가요? 여행을 왔는데 마침 딱 아쿠아 알타 기간인 건 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베니스의 진면목을 경험하고 가는 거죠.”


그 대답 한 마디에 나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좋은 여행이란 자고로 날씨가 좋아야하고, 그래서 예쁜 사진을 많이 남겨야하고,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져야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파리에서부터 날씨가 안 좋을 때마다 나는 나의 불운 지수를 한탄했다. 날씨 악마인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여파는 베니스 여행에까지 이르러 이런 고난을 겪게 된 것만 같아서 라니언니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이 언니는 유럽여행 자체가 처음이었다. 파리도 나만 믿고 따라왔고 이탈리아 여행도 나 역 시 베니스는 처음이지만 로마는 이미 가본 적 있었기 때문에 다 나를 전적으로 믿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녀는 나 때문에 평생 겪지 않아도 될 시련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그 생각을 완전 뒤집게 만들었던 말 한 마디였다. 내가 그동안 여행을 얼마나 편협한 시선으로 봐왔었는지 새삼 반성하게 되었다.


직원의 말이 맞았다. 날씨로만 치면 정말 최악의 날씨였고 물살을 가르고 가야하는 미친 여행길이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도 이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미화되어서 그런지, 아쿠아 알타를 경험하게 한 베니스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인상적으로.

그래서 또다시 아쿠아알타를 경험하는 한이 있더라도 베니스에 꼭 다시 한 번 가고 싶기도 하다.

다음날 직원 말대로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여행에 대한 나의 시선이 바뀌었다. 날씨가 좋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여행은 언제나 좋다. 나의 사유의 세계를 넓혀주고 다른 타격감으로 나에게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Venice, the adventure begins!



[Behind the Scene]

1. 드디어 문제의 침수 사건 등장입니다. 아직도 저 날은 잊히지가 않네요. 호텔 체크인을 위해 잠수를 해야했던... 수심은 허리정도까지였습니다. 다른 외국인들도 첨벙첨벙 물 속에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2. 직원과의 대화는 저에게 큰 인사이트 변화를 남겼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3. 진짜 영어로 대화한 거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렇습니다. 이탈리아어로 간지나게 해야하는데 이탈리아어까지 정복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어를 알면 이탈리아어랑 스페인어는 금방 습득한다고 합니다. 뿌리가 같아서요. (프랑스어부심)

김톡끼랑 해외여행가면 편합니다...? 아마도? 다만 몸은 안 편할겁니다. 일정이 빡세서...☆

화, 수,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