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Mbti 같은 성격 유형 검사들이 유행이다.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테스트들에 열광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자신을 규정해주는 틀을 갈망하며 비슷한 유형의 무리에서 동질감을 나누려는 것. 타인과 그런 감정을 공유하며 안정감을 얻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그런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비주류 인간들에게 가혹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회는 개성을 말살하는 교육과정을 버텨낸 인간들에 의해 굴러가는 탓인지, 소속되지 않고 ‘튀는’ 자를 그다지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다수의 세상에서 동떨어졌다는 소외감을, 거부감 어린 시선들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평범한 게 가장 어렵지 않나. 그 틀을 정해 맞춰 가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다양한 행복의 형태를 알아가고 싶다. 그렇게 다채로운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이 오기를.
아직은 그런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고, 자신의 중심은 개인적 노력으로 지켜야만 한다. 다수가 규정해둔 ‘이상적’ 상태, 혹은 그들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는지 살펴보며 말이다. 이처럼 치열하게 자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나와 당신들, 우리 모두를 비추는 소설로 <닥터 지바고>를 읽었다. 암울한 시대를 버텨낸 이들 삶의 역동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기억하려 한다.
‘지바고(Живаго)’라는 성에 ‘살아있는, 생생한’등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이야기는 일가족의 비극으로 시작된다. 어머니의 장례식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자살. 이미 끝나버린 ‘지바고’ 부부의 삶에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선대의 운명은 아들 유리 지바고의 순탄치 않은 미래, 나아가 격동기 조국 러시아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암담한 미래를 암시한다.
20세기 러시아의 굵직한 흐름은 두 차례의 혁명을 따라간다. 1905년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민중의 권리를 인정받게 된 1차 혁명과 1917년 볼셰비키에 의한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이라 불리는 2차 혁명이다. 후자는 더 자세히 2월과 7월 혁명으로 나뉜다. 러시아의 민중, 작가이자 의사인 유리 지바고는 이렇게 격변하는 시대의 중심에 있다. 부모를 잃은 후 그로메코 집안과의 인연으로 나름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내며 지식인으로 성장했으나, 그 삶과 사상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의사이면서 불멸을 믿는 지극히 종교적 태도와 혁명을 꿈꾸면서도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자세가 바로 그 모순이자, 지바고가 생에서 겪는 괴로움의 근원이다.
폐렴에 걸려 죽음을 앞둔 안나 부인은 그에게 위로를 청한다. 이어지는 지바고의 긴 독백은 따뜻하고 감상적인 투는 아니지만, 의사다운 객관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학자로서 인간의 의식, 죽음과 부활, 믿음에 관한 자신의 철학으로 환자를 달랜다. 지바고가 말하는 ‘부활’의 깊은 개념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은 너무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감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복음을 따르며, 우주를 가득 채우는 생명이 무수한 결합과 변형을 일으키며 부활한다고 믿는다. 그 근거는 ‘인간의 의식’이 외부, 즉 타인을 향한다는 특성에 있다.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이나 사진 등 다른 외부 매개체를 통해야 하듯,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존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좋든 싫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결국 ‘우리’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한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흐르는 인류의 관계, 그 상호작용 속에 ‘나 자신’은 영원히 가족, 친구, 사랑하는 어떤 대상으로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며 그들과 함께 미래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앞으로도 역사와 함께 영원히 존재할 우리는 그 따분한 주제가 아니라 좀 더 생산적이고 유의미한 것에 몰두해야 한다.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무수히 많은 ‘우리’들 중 하나로 살아가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영원한 삶’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개인’으로 기억되고 존재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의 획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재능’이다. 실존하는 인간은 타인과 구별되는, ‘나’를 오롯이 ‘나’로 존재하게 하는 인간의 독창적인 개성을 모색해야 한다. 지바고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적 의식은 그의 일생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재능’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독창성, 개성은 ‘생명’과도 연결된다. 그는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상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은 각자가 개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들에게 복종이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지바고가 생각하는 혁명사상이다.
때문에 그가 보는 당대 러시아와 ‘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는 혁명사상은 매우 기괴하다.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유행, 나아가 ‘대세’가 되어버린 혁명 정신은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만연하던 대중 예술, 문화, 철학들은 독창성이 없고, 개인의 특색을 띠는 것은 불온한 사상 취급을 받는다. 그것들은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와 다름없다.
그래서 그는 더욱 ‘자신’에게 집중하려 몸부림친다. 개성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글쓰기’에 빠져들게 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인 ‘가정’을 원한다.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족과 그들이 공존하는 ‘집’은 그런 따뜻함이 결여된 여느 공동체보다 ‘참된 자기로의 복귀’가 가능한 공간이다. ‘개인’들은 이렇게 서로를 향한 사랑이라는 끈끈한 유대로 모인다. 그래서 ‘우리’의 형태로, 그 이름 아래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작가는 결국 ‘나’와 ‘우리’, ‘개인’과 ‘집단’의 두 개념이 서로 불가분 하면서도 순차적으로 형성되는 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토냐, 라라, 마지막으로 마리나와 함께하며 그는 끊임없이 가족을,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원했다. 그중 가장 사랑했던 라라와의 ‘가정적’ 공간, 바르이키노에서 경험하는 행복은 그의 예술성을 최고조로 이끈다. 현실을 직면하고 시대에 맞서는 대신 그는 시인으로서 예술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바고는 시대에 편승해 혁명을 부르짖는 무리에 반감을 느낀다. ‘혁명가의 전형’, ‘혁명적 인물’이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있어서 칭찬보다는 욕에 가깝다. 그러나 라라의 남편이자 *볼셰비키인 스트렐리니코프에게서 그런 무리들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받는다. 라라와 함께 그를 회상하던 지바고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사람이 야만적인 군인이 아니면 혁명의 광신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인 것을 알게 되었소. 어떤 사람을 봤을 때, 상상하던 인물과 현실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 사람은 어떤 형(型)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어요. 어떤 형에 맞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으로서는 끝장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가 없다면, 적어도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라도 살아 있는 인간임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불멸의 기질을 가졌어요.”
이것은 새로운 혁명가의 모습이다. 유형화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그래서 지바고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볼셰비키: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를 가리키는 말로 멘셰비키에 대립된 개념이며, 다수파(多數派)라는 뜻으로 과격한 혁명주의자 또는 과격파의 뜻으로도 쓰인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의사 지바고> 도서출판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