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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Mar 20. 2023

공부 잘하는 거지

시험 기간. 아이들이 아니라 내 시험 기간이었다. 시급으로 돈을 받는만큼 난 시험 기간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갔다. 시험 본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아니건만, 벼락치기로 급한 불을 끄느라 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날도 밤을 새고 시험 두 개를 끝난 뒤 씻지도 않고 뿔테 안경에 낡은 목도리만 둘둘 두르고 출근했다. 오전은 저학년 반. 놀아주고 공부시키고 다시 놀아주고 펄러비즈를 했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애증의 펄러비즈. 쌀알만한 작은 비즈를 플라스틱 판에 꽂아서 여러 캐릭터 모양을 만드는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마지막에 다리미로 펄러비즈를 꾹꾹 눌러 녹여주어야 한다. 다리미질에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앞면을 녹이고 뒷면을 똑같이 녹이기 위해 뒤집을 때, 혹여 잘못할 경우 펄러비즈가 플라스틱 판에서 떨어져 캐릭터가 완전 망가진다. 강 선생님의 입장에선 펄러비즈가 좋다. 아이들이 한참 집중하느라 가만히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선 펄러비즈가 싫다. 네 명의 아이들이 펄러비즈를 하면 다리미질도 네 번 해야 하는데 그중에 한 번은 꼭 망가지고, 그러면 난 울상이 된 아이를 옆에 두고 ‘괜찮아! 선생님이 고칠 수 있어!’라고 대책없는 약속을 한 뒤 한 시간 내내 펄러비즈를 새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아무려나 펄러 비즈 시간이 끝나고, 다리미를 끈 뒤 뭉친 어깨를 풀면서 위층으로 올라가면 고학년 방과후 연계형 교실. 고학년은 펄러 비즈는 하지 않는다. 늘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이곳은 일단 재료가 없다. 그래도 늘 고함 소리와 웃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내가 도착했으니 이제 연계형 교실도 공부 시간. 선생님이 빈 플라스틱 물통으로 칠판을 탕탕 치며 아이들을 자리에 앉힌다(강아지 행동 교정 프로그램에서 훈련시킬 때 똑같이 저 플라스틱 물통을 쓰는 걸 본 뒤로 늘 기분이 묘하다). 난 4학년 아이들의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책상을 배치한다. 가르치는 학생은 주영이, 희수, 규민이. 


주영이가 펄쩍 펄쩍 뛰어와서 내게 안긴다. 

“선생님, 오늘 얼굴이 무슨 일이에요.”

“왜.”

“선생님 지금 마치, 거지 같아요.”

난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외투는 단추까지 잠갔다. 몸도 마음도 춥고 피곤하다. 

“그래, 고맙다.”

수업 시작까지는 오분 정도 남아있다. 주영이가 내 무릎에 앉아 머리를 기댄다. 또 옆에는 희수가 와서 반대편에 몸을 기댄다. 반은 애정 표현이고 반은 장난이다. 난 엄마닭같은 기분이 되어서 앉아 있다.

“선생님 집에 놀러가고 싶어요.” 주영이가 말한다.

“저도요. 초대해주세요.” 희수가 말한다.

“선생님 집은 이 교실보다 작아.”

나야 원룸 자취생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 하나로도 꽉차는 데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을리가. 가끔 널찍한 교실을 보면 그냥 여기서 사는 게 더 삶의 질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 여기보다 작은데도 사람이 살아요?”

오늘 이 녀석들이 날을 잡았나. 가슴에 비수를 사정없이 꽂는구나. 

“희수 너는 꼭 여기보다 큰 데서만 살아라...”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문제집을 펼치라고 시키고 주영이와 희수와 규민이가 자리에 앉는다.

“선생님! 공부는 왜 해야 하나요?”

꼭 수업 시작 전에 이렇게 묻는 아이들이 있다. 주영이가 대표적이다.

“공부를 해서 대학도 가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넓어지지.”

난 사실 아무 말이나 막 뱉고 있다. 머릿속은 평화로운 초원을 떠올리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도 가고 하면요.”

주영이가 다시 나한테 팔짱을 끼면서 머리를 기댄다. 

“선생님처럼 공부 잘하는 거지가 되나요?”

주영아, 너는 정말 앙증맞고 예리하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인생은 나보다는 네게 더 열려 있으니 오늘은 공부를 하자. 난 내 팔에 기댄 주영이를 떼어내고 수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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