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반에나 선생님이 골치 아파 하는 아이들이 있다. 통제가 어렵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부루퉁하게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한 반에 한 두명 정도다. 난 이런 아이들을 쉽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돌봄 3개 반을 왔다갔다 하며 지내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이 쉽지 않은 아이들이 누구인지 미리 파악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쉽지 않은 아이들 뒤에는 보통 쉽지 않은 학부모가 있고, 아이가 한 말을 바탕으로 선생님에게 항의 전화가 온다.
오늘 돌봄 2반의 오전 2타임 선생님도 그런 전화를 받고 무척 기분이 상했다.
2학년 지유가 어제 국어 학습지를 안 한 이유로 2타임 선생님이 국어책을 가져가서 할 수가 없었다고 엄마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고 항의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지유와 지유 어머니 둘 다에게 화가 났다. 지유는 대표적인 쉽지 않은 아이다. 잠깐 눈을 떼면 친구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수업 시간에 허락되지 않은 놀이를 하고 있거나 마스크를 벗고 있다.
그래서 지유와 나 사이의 대화는 대개 이렇게 흘러간다.
“밥 먹기 전에 책상 위 장난감은 다 치워야 해.”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그냥 아니에요. 안돼요. 싫어요. 못해요.”
싫어요와 못해요를 연속으로 여덟 번 정도 듣다보면 내가 필경사 바틀비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분홍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지유는 선생님과 학교라는 권위에 굳건히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바틀비는 결국 굶어 죽지만 지유를 그렇게 놔둘 수 없으니 선생님들은 이런 거절을 무시하거나 타협한다. 난 늘 타협하는 쪽이다. 장난감을 치우라는 나와 절대 안된다는 지유. 우리는 결국 서랍장 위에 장난감을 올려 놓고 밥을 먹는 것으로 타협했다.
급식 시간이 끝나면 로봇 조립 시간. 기현이가 날 불러서 두어 번 알려주다 다른 아이를 봐주러 움직였다. 기현이는 자기가 불러도 내가 오지 않자 방법을 바꿨다.
"선생님은 쓸모없는 사람이야!"
로봇 조립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서 당황하는 동안 내 뒤에서 기현이는 열심히 외쳤다. 1학년 기현이의 말로 비수를 꽂는 능력이 언제 저렇게 발달했나 새삼 감탄했다. 나와 함께 일하던 대학생 선생님은 기현이와 하루 같이 있고 난 뒤 퇴근하는 길에 울었다.
사실 거짓말이나 친구와의 다툼, 선생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건 견딜만 하다. 거짓말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되고, 제멋대로 하는 건 중간에서 적절한 타협선을 보면 된다. 늘 그런 해결책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간과 끈기, 많은 에너지를 들이면 할 수 있다. 아니면 그냥 무시하거나(바쁜 선생님들은 보통 후자를 선택한다).
정말 골치가 아픈 건 비명을 지르며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는 경우다. 순식간에 반 분위기가 변하고 통제할 수가 없다. 선생님들이 전부 회의한다고 교실을 비우고 나 혼자 스물 대여섯 명의 아이들의 급식과 통제를 책임졌던 날, 민혁이는 마스크를 벗고 오랑우탄처럼 뛰어다니며 내 다리에 계속 머리를 부딪혔다. 몇몇 남자 아이들이 환호하며 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감정을 드러내면 그거야 말로 지는 일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돌봄 관계에서 어른(선생님)과 아이는 늘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한다.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그러나 내가 멈추라 말한다고 아이가 듣는 것도 아니다. 이를 위해선 카리스마와 냉정한 판단력, 고도의 비언어적 기술이 필요하다.
그날 난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쳐 오르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머리 뚜껑이 열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깨달았지만, 참았다. 안 참는다고 내가 민혁이를 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하지만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한 줄기 이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난 심호흡을 아주 천천히 했다.
오전반 선생님이 오셔서 나는 민혁이의 행동에 대해 말했고, 선생님은 민혁이에게 손들고 서 있기 벌을 내렸다. 난 다른 반에 가야 해서 교실을 나왔다.
쉽지 않은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것과 별개로, 난 선생님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을 꽤 좋아한다. 권위에 도전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학생은 의자에 바르게 앉아야 해)는 무시하고,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아이는 아이여도 멋있다. 인생을 살아가며 언젠가 갖춰야 할 태도를 미리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대가로 선생님들은 학을 떼고 아이들은 눈총을 받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반항심은 자신감 떄문이라기보다는 가정 환경의 불화, 외로움, 분노 등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돌봄 교실이 소규모로 (5명 정도)로 운영되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민혁이의 법석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봄 교실은 그렇게 운영하지 않는다. 난 가끔 이 교실이 돌봄보다는 통제에 더 기준을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아이들이 얼마나 바르게 앉아서 있는가. 얼마나 거리두기를 잘하고 있는가. 어른들이 보기에 얼마나 바람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돌봄은 당연하게도 저런 정적인 게 아니다. 박치기를 하던 마스크를 쓰느냐 벗느냐를 갖고 실랑이하건 아동 돌봄은 직접 대면하고 주고받고 느슨하건 팽팽하건 줄다리기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비언어적인 소통(말투, 표정, 주변의 분위기, 방금 전에 있던 알 수 없는 일 등)이 항상 영향을 준다. 예측할 수 없고 기대한 대로 흘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돌봄은 날씨같다.
아무려나, 난 반쯤 열린 머리 뚜껑을 다시 잠재우고 창문 밖에서 민혁이가 손을 들고 있는 걸 봤다. 줄무늬 티셔츠가 위로 올라가고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보고 있는데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오전반 선생님한테 말한 것도 손들기도 다 뻔한 연기같다는 생각을 했다. 벌준다는 건 그냥 제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했다고 권위를 통해 상대를 괴롭히는 게 아닐까? 중요한 건 내가 아이한테 그만큼 열받을 수가 있다는 걸 깨달은 점이다. 타협이고 뭐고 지금 이 순간 화풀이로 이 녀석을 한대 쥐어박고 싶은 강한 욕구 내 속에 있다는 걸. 그걸 관리하는 방법은 당연히 내가 참는 것이다. 돌봄은 사실 아이들을 통제 하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장 잘 통제해야 하는 일이다. 난 어른이고 아이들은 내 보호 아래 있으니까.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늘 착하진 않고 그래서 언어로도 신체적으로도 나를 통제하려는 마음은 금방 흔들린다. 아빠가 내 어린 시절 열심히 회초리를 휘둘렀던 마음도 다 이런 분풀이였나. 내가 날 때리던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 권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자 갑자기 나도 싫고 돌봄 교실도 싫고 노란 페인트칠로 반짝이는 학교까지 전부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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