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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

내가 사랑한 홍콩 영화

by 예빈 예준 엄마

때는 2001년 초여름.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분위기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회사를 퇴근하고 돌아온 저녁, 갑작스런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갈랐고,

창밖에는 거센 소나기가 쏟아졌다.
방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우연히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첨밀밀》(Comrades: Almost a

Love Story)이었다.

첫 장면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차 안, 등을 맞대고 나란히 앉은 남녀. 이요금과 여소군.
서로 존재조차 모른 채,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설렘과 긴장을 품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그 모습.
도착지에 가까워질 즈음, 두 사람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고, 말 없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그런

출발선에 서게 될 날을 상상했다.

이요금과 여소군은 홍콩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다시 마주친다.
여소군이 일하던 맥도날드 매장에서,

이요금은 주문조차 버거워하는 어색한 새 이민자였다.
그에게 북경어로 조용히 말을 건 여소군.
그 짧은 한마디는, 이요금에게 그 어떤 환영보다

따뜻한 위로였다.
외국 같은 도시에 살면서, 누군가 고향의

말을 걸어준다는 것.
그건 단지 의사소통이 아니라

‘내 편이 여기에 있다’는 감정이었다.

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날, 이요금은 여소군에게 맥도날드

종이냅킨 하나를 더 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그것에, 본토에 있는 여자 친구 ‘아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또박또박 써 내려간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소군의 표정엔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마음 한편에 이요금이라는

사람이 스며들고 있음을.

어느 날은 둘이 등려군의 레코드를 팔러 거리로 나섰다.
가수는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음악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쁘고 삭막한 도시의 거리에서,

따뜻한 음악은 기대만큼 팔리지 않았다.
결국 그날, 둘은 몇 장 남은 레코드를 들고

여소군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소군이 끓인 만두국을 함께 나눠먹었다.
국물 속엔 무언의 위로와 정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등려군의 노래는 팔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더욱 조용히 가까워졌다.

그 즈음의 여소군은 삶의 불안정 속에서도

유난히 빛나 보였다. 이요금과 같이 있어서 였을것이다.
사업설명회였을까. 거기서 그녀는

파인애플 소시지를 먹고 있었는데,
그 짧은 순간—작고 따뜻한 먹거리를

한 입 베어 무는 그녀의 표정이
왜 그리도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이요금은 그런 여소군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마음에 깊이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차를 타고 타고 가던 여소군을

따라 골목길을 달리던 이요금.
그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주저 없이 뛰었다.
결국 차가 멈추고, 여소군의 차가 섰을때

이요금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 장면은 뜨겁고 격정적이었지만,

동시에 그토록 간절하고 절박했다.
마치, “지금 아니면 영영 놓칠지도 몰라” 라는 외침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순조롭지 않다.
여소군은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이요금을 좋아했지만,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안정된 삶을 위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이요금은 실망하지만, 그녀의 선택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부서지고 다시 일어선다.
여소군의 남편은 뉴욕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고,

이요금은 범죄에 연루되어 수감된 후 홍콩을 떠난다.
그렇게 둘은 또 한 번 엇갈린다.

그리고 마침내, 눈 내리는 뉴욕의 거리.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이요금은 음식 배달원으로,

여소군은 새로운 삶을 찾아 타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임스퀘어 근처.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
그 음악을 따라 돌아보던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서로를 보고 웃는다.
말없이,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는 미소로.

사랑은 그렇게 다시 돌아왔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마음은,

긴 시간을 돌아 어느 눈 내리는 겨울 저녁,

다시 손을 내밀었다.

영화는 처음과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등지고 스쳤던 그날의 기차가,
이제는 눈 내리는 거리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의 미소로 완성된다.

운명은 돌고 돌아 다시 같은 자리로 데려왔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첨밀밀》은…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그건 한 시절을, 한 도시를, 그리고 한 사람의

삶 속에 남은 사랑의 잔향을 담은 이야기다.
처음 본 날의 기억처럼, 그날의 천둥 번개와 만두국,

레코드와 편지들이 아직도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날,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다시 흐르던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이었는지, 아니면 〈月亮代表我的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노래가 다시 그들을 마주 서게 했다는 것.
그리움은 기억보다 오래 가고, 사랑은 음악보다 깊었다.

사랑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첨밀밀》이 그날 내게 속삭였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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